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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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나를 통하지 않고는 영생의 세계에 못 간다고 하셨다.
그 말씀은 내 말을 절대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제 1조는 무엇이고 제 2조는 무엇이며 이렇게 법률조항처럼 나열한 적이 없다.
명령(계명)이라 하지마는 우리가 실제로 무엇이 명령(계명)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풀어서 말하자면 이것은 예수님의 원리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의 법률 조항이나 구약에서처럼 무엇을 하라, 하지말라 나열하지 않았음으로 우리가 스스로 정확하게 파악하는 길 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런 것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노력이 없이 저절로 되지는 않는다.
그런고로 말은 간단하나 파악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음으로 딱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파악한 다음에는 절대로 지켜야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명령(계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로 지켜야 하는데 지키면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오늘 성경에서 하는 말은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낸다는 것이다.
보혜사는 희랍원어로 ",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라는 말인데 그 뜻은 명사로서”변호자”, “돕는자”, “중재자”이며 옆에서 돕는 자, 옆에서 변호해 주는 자, 옆에서 조언해 주며 중재해 주는 자를 뜻한다.
우리가 모르는 것, 우리가 가는 길, 우리가 판단을 못하는 것 우리가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한 것들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고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번역이 제대로 되었더라면 이해하기 쉬웠을 것인데 보혜사라 번역해 놓으니까 이것을 특별한 성령의 작용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이 세상을 걸어갈 때, 즉 천국의 길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우리들이 잘 볼 수 없거나 잘 들을 수 없을 때 우리의 옆에서 말해주고, 지시해주고, 고쳐주고, 우리로 하여금 내부적으로 새롭게 인식해 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세상은 모른다는 것이다. 즉 세상사람은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만 필요한가 바로 저 세계에 갈수 있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다.
즉 저 세계에 갈수 있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의 세상 사람들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영물(靈物)이다.
영생의 물건이다는 것이다.
세상물건이 아니고 영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성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이 존재는 오늘은 있다가 몇 년 지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은 육체의 인간은 영원성이 없는데 이 파라클레토스는 영원히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파라클레토스가 내게 내리면 내 자체가 영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주 중대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세상일에만 정신이 빠져 있는데 시간이 가면 어떻게 되는가?
이 세상 생명이 내게서 끊어지는 날 나는 없어지는 것이다.
내가 요즈음 가장 중요하게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시간이다.
사람에게 근본적인 소유라 하는 것이 시간인 것이다.
이것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거나 부자나 가난한자 모두 시간의 소유는 같은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속한 것에 묻혀 살거나 거기에 정신을 두게 되면 결국은 자기의 소유를 다 빼앗기는 것이다. 도적 맞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을 빼앗기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내가 그림을 좋아해서 미술관을 관람을 하였다고 보면 좋은 그림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감상하며 그 때 잠깐 기분은 좋을지 모르지만 지내놓고 난 다음 그것이 내게 어떤 이득이 되는가?
허탄한것(거짓되고 미덥지 아니한 것)에 시간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시간을 아껴서 예수님을 알려고 노력할 때 파라클레토스가 내게 오는 것이다.
옆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다.
시간을 아껴서 예수님을 알려고 노력할 때 파라클레토스가 내게 오는 것이다.
파라클레토스는 내게 위로를 주고 용기를 주며 내게 계시를 해준다.
또한 내게 힘도 주고 격려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단 이것은 세상은 모른다는 것이다.
받는 사람만 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이것을 성령의 특별한 보조가 있어서 신자를 도와주는 그런 식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인가?
일부 기독교가 2천년동안 이것의 정확한 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특별히 성령의 감화를 준다. 감동을 준다.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된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 개성에 내리는 내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내가 여러 번 이야기 했듯이 ‘씨’이다. 씨를 말한 것이다.
이 씨는 다시 말하면 천국의 자손인 것이다.
천국의 백성, 천국의 인민인 것이다.
요한복음 여기서 말한 보혜사는 바로 씨인 것이다.
그런데 이 씨가 처음부터 보혜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씨가 자라서 30%. 60%, 100% 되었을 때 비로서 보혜사의 역할을 하는
이 씨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면 보혜사의 역할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파라클레토스의 역할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영생이다 .
내 속에 내렸던 씨가 자라게 되면 이것은 영물인 것이다. 육체가 아니다.
저 세계에서 내려온 영물이므로 따라서 육체는 시간이 오면 땅속에 버리고 나는 이 보혜사(성장한 씨)란 존재와 같이, 즉 씨의 성장과 함께 저 세계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세상은 모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씨를 뿌리는 사람이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다.
그런데 씨를 어디에 뿌리는가?
아무데나 뿌리는가? 아니다. 옥토에 뿌릴 목적으로 뿌린다.
마태복음13장 4-8절에 보면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짝밭에, 더러는 가시덤불에 떨어 질 수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씨는 옥토에 뿌릴 목적으로 뿌리는데 혹 더러는 옥토 옆 가시덤불이나 길가에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성장을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내가 옥토의 성질을 가지고 있고 씨가 뿌려졌다 해도 처음에는 그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내 속에 씨가 내려진 것을 잘 감각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느정도 자라면 자연히 스스로 조금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적에 명심해야 될 것은 내 속에 예수께서 내려 준 씨가 있는가? 와 있다면 자라는가가 문제이다.
우리는 씨를 받도록 노력해야 하고, 즉 옥토의 자질을 가질 수 있도록 되어야 하며 그 다음에는 키워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비참한 존재로 전락되어 없어지는 것뿐이다.
우리는 이 세상 살아가는 방법으로는 저 세계에 갈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파라클레토스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도 잘 모르고 자기 자신도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이것이 내게 내려 최저 30%이상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힘으로 영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 파라클레토스가 내 옆에 있음으로 인해서 내 자신이 자연히 영생의 세계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 속에 내리면 내 모든 인격이나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 이런 모든 것이 파라클레토스로 이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씨가 내려도 내 자신은 모르지만 이것이 어느정도 성장하게 되면 자연히 조금씩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옥토의 소질을 가지고 있을 때 내려지는 것이다.
내려지면 이것이 처음에는 조그마한 원자와 같이 작은 존재이지만 성장해서 30% 이상이 되면 저 세계로 이양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나온 내용을 지금까지 대부분의 기독교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다.
이것을 성신이 내게 감동을 준다. 성신이 나하고 같이 있다. 이런 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것은 내 속에 있는 근본적인 생명체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한번은 씨라 말했고 한번은 오늘 여기서 말한 파라클레토스, 보혜사란 말로 했다.
이외에도 예수님이 다른 방법으로 설명했을지 모른다.
나 자신도 이것을 처음 공부할 때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다.
씨란 말은 아주 중대한 말인데 마태복음, 마가복음과 누가 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에 있는 이 말씀도 몇 십번 읽으면서도 처음에는 잘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가 같은 말을 한가지 방법으로만 말씀하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세상 인간들이 알 수 있도록 다른 방법인 비유로 말해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줄거리를 보면 마태복음의 씨와 같은 의미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씨의 원리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야기한 가장 핵심적인 말씀 이었다.
씨에 대한 문제는 또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주요한 근본목적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씨가 성장해서 적어도 30%이상 되었을 때 각자에게 주는 영향력이라는 것이 바로 오늘 여기에서 말한 보혜사의 역할인 것이다.
내게 대하여 옆에서 말도 해주고 가르쳐주고 인도해주고 천국에 가는 길도 가르쳐 준다 하는 것을 예수께서 말해준 것이다.
그런고로 문제는 내 자신이 옥토의 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내 자신이 언제나 옥토의 소질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필요하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