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이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냈다.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1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너희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집주인이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알고 있으면, 그는 깨어 있어서,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44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는 시각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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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은 마가복음13:32~37절, 누가복음21:34~36에 비슷하게 나와 있다.
오늘 본문에서도 지금까지 기독교가 전혀 생각지도 않은 대단히 중요한 말이 있다.
예수님이 오기 전에는 사람들은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가고 세상일에 전념하지만
그러다가 갑자기 예수께서 오시면 선택 받지 않은 자들은 준비가 없으므로 당황할 수밖에 없다.
또 예수님으로부터 선택 받는 사람들도 이미 천국에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안된다.
구원 얻을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을 때도 천국일 만을 생각해야 된다.
시간이 오면 이 세상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 되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들의 활동은 천국의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목표가 천국이어야 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와서 가르친 말씀 가운데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윤리나 경제나 혹 정치 문제에 대해 일체 언급한 적이 없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물론 제자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어 왔을 때는 이 세상일에 대해서도 가끔 대답해 준 일이 있으나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혼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절대로 이혼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러나 간음한 경우는 별 문제라고 하셨다.
즉 간음했다고 꼭 이혼하라는 것은 아니고 이혼 증서를 써주면 이혼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다.
이런 것들도 세상 사람들의 질문때문에 대답한 것일뿐 그것이 예수가 이 세상에 와서 가르쳐야 할 진리는 아니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런 것은 예수가 언급하지 않은 항목이다. 문제도 안 된다.
그것을 잘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생물인 까닭에 시집가고 장가가고 한다는 그런 의미이다.
본문에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 앞으로 닥칠 고난과 징조에 대해 경고하시면서 그 상황에 대응할 행동 지침을 내려 주셨다.
이제 이 세상에서 선택 받은 자들에 대해 천사들에 의해 인도되어 이 지구상에서 빠져나가게 되면 이 지구상에 남은 그 이외의 사람들은 생물 중 하나로 동물과 같게 된다.
단지 그 지혜나 생활 방법이 다를 뿐이지 다른 동물과는 차별은 없다.
인간들 스스로는 자신들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는 그 특권을 소유하기 전에는 동물의 하나일 뿐이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것으로 삼강오륜을 말한다.
삼강오륜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과 다르고 특별한 존재라고 강조한다.
삼강오륜 가운데 하나는 사람은 부모를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사회를 살펴보면 인간의 부자관계의 개념이 점점 희박해져 간다.
일례를 들면 남녀가 결혼을 하면 부모 모시기를 꺼린다.
그래서 핵가족이 좋다고 떠드는 것과 같이 동물의 세계로 전락한 것이다.
남녀가 결혼해서 사랑하고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동물의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고 어떤 경우는 동물의 세계에서 새끼들에 대한 보살핌이 더 간절한 경우도 볼 수 있다.
그런고로 우리들이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옮겨지기 전 까지는 우리는 동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께서 너희들은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핵심이다.
언제 주님의 사자가 문밖에서 부를지 모른다는 것이다.
천사가 부르면 그 때가 어느 때인지 모르지만 여유가 없으므로 언제든지 부르심을 받을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된다는 그런 말씀이다.
그런데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도 모르고 인자인 나도 모른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예수님 말씀이 나도 모른다고 분명하게 언급하셨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 시간이 가까워 왔다는 증거는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지만 어느 시간에 올지 그 시간은 인자인 나도 모른다 했다.
여기서 우리는 큰 문제가 하나 있다.
예수님도 모르는 것이 있다는 그런 말이다.
이 세상의 말세가 어느 때 오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뿐 아니라 그 외에 많은 큰일도 예수께서 모르고 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우리는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 되돌아보며 생각해야 한다.
소위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삼위일체론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일체라는 것이다.
만약 삼위일체가 사실이고 맞다고 하면 예수께서 이 세상 끝 날을 모르고 있을 수가 있겠는가?
예수께서는 분명히 어느날 주가 임할지 아버지 외에는 나도 모른다 했다.
예수님과 아버지가 일체라고 하면 예수께서 모를 리가 없다.
예수님이 모른다고 한 것은 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성경의 말씀이 이천년 동안 내려왔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학자도 여기에 대해서 생각하고 언급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이 삼위일체설에 근거해서 기독교 신앙을 강요하고 있다.
삼위일체 사상은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니고 세계 여러 종교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가장 가깝게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정통신앙인 바알신(神)에서 찾을 수 있다.
팔레스타인에는 엘신(神:남성)이 있고 아세라신(神:여성)이 있다.
이 둘 사이에 난 신(神)이 바로 바알신(神)이다.
그런고로 이 세 신(神)이 삼위일체 격으로 되어있는 신(神)이다.
이외에도 인도지방의 신(神)으로 브라흐마(Brama) 비슈누(vishnu), 시바(shiva) 이 세 신(神)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
브라마는 창조의 신(神)이고 비슈누는 유지하는 신(神)이며 시바는 나쁜 것을 파괴하는 신(神)이며 새것을 만드는 신(神)이다.
그러므로 창조주가 만들고 그 만든 것을 유지하고 또 나쁜 것을 고쳐주고 그래서 이 세 신(神)은 하나라는 그런 말이다.
우리나라도 삼신제가 있는데 세 신을 한데 모아 제사를 지내는 관습이다.
이 삼위일체 사상은 AD325년에 콘스탄티누스1세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와 교부들이 “성자와 성부와 성신은 동일한 실체”라고 결정 한 것이 그 근원이다.
또 이 삼위일체 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사람은 아우구스투스 주교로 4세기 알제리와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신학자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켜서 삼위일체라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단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뜻이 같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예수님 자신과 제자들도 하나이고 또 제자들도 하나가 되라 하셨다.
그것 역시 뜻에 있어서 하나 되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우리 신자들을 보고 너희들이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고 아버지와 나와 너희들은 하나라고 강조하셨다.
이 말은 뜻에 있어 하나라는 말씀이며 그 존재에 있어 하나라는 말씀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기독교 신앙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삼위일체론을 다른 종교로부터 들여와서 강요된 것은 대단히 슬픈 일이다.
지금 기독교에서는 ‘여호와가 예수다.’, ‘하나님이 세상에 내려오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다.’ 등등 삼위일체설에 관련해서 여러가지 가설들이 회자되고 있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면 자연스럽게 무시해도 되는 이론일 뿐이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그 시간은 언제인지 나도 모른다 한 말씀으로서도 알 수 있다.
또 요한복음14:28절에 보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예수께서 여러 군데서 말씀한 전체를 보면 자기와 아버지 사이의 관계를 말해 주었다.
나는 아버지께서 보내서 왔다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요한14:28(너희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온다고 한 내 말을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하나의 큰 고민이 있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들었고 예수님도 하나님께서 보내서 왔지만 그러면 그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에 대한 생각이다.
하나님을 누가 만들었다고 하면 그 만든 신(神)은 또 누구인가?
그 다음 또 그 신(神)을 만든 자는 누구인가?
이 문제가 잘 인식이 안되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존하는 자다.’ 라고 말한 것은 말은 쉽지만 억지 같아 보였다.
다시 말하면 없는 것은 없는 것이지 스스로 생긴다는 것은 인식할 수 없는 말이다.
정상적으로 신(神)을 믿는 사람은 이런 의문이 들고 이성을 가진 사람으로 볼 때는 잘 납득이 안되었다.
따라서 창조주가 어떻게 스스로 생길 수가 있는가? 에 대해서 의문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것을 온전히 설명하기는 곤란하지만 그러나 한 가지 간단히 언급하면 하나님은 진리인 까닭에 자존하게 된다는 인식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이 세상 말로 표현할 수가 없고 인식시킬 수 없는 까닭에 예수님을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보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식할 수 있고 예수님을 접할 수 있고 예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까닭에 그를 통해서 그의 아버지 되시는 분을 인식할 수가 있다 그런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낸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자기를 알게 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
그러므로 예수님 이전에 이 땅에서 자신을 이름을 드러내고 활동했던 신(神)들은 창조주가 아니다.
대단히 중요하다.
스스로 자존하는 자에게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왜 그러한가?
이름이란 그 사람이나 그 신(神)을 다른 사람이나 다른 신(神)과 구분하기 위해 그 특성을 나타내어 붙여진다.
예를 들면 이삭은 그의 부모가 그의 탄생에 관련하여 여호와 앞에서 웃는 일에 기인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야곱은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왔다 해서 붙여졌고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신(神)과 씨름을 했다고 해서 붙여졌다.
이와 같이 사물에 이름을 부친 것은 그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예수의 아버지 되는 신(神)에 대해서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는가?
자존자라는 대명사 외에는 붙일 수 있는 이름 즉 고유명사는 있을 수 없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라 부르는 이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이사야 44장에 보면 신(神)은 하나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로마서3:30절에 보면 신(神)은 하나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이 말에 근거해 여호와를 하나님이라 하고 있다.
이사야44:6~8(이스라엘의 왕이신 주, 이스라엘의 속량자이신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시작이요, 마감이다. 나 밖에 다른 신이 없다. 누가 나처럼 선언할 수 있으며, 미래를 예고할 수 있느냐? 나를 누구와 견줄 수 있느냐? 만일 있다면, 내가 옛날 사람들에게 미래를 예고했듯이, 그들에게 다가올 일들을 미리 말하여 보라고 하여라. 너희는 떨지 말아라. 겁내지 말아라. 내가 예전부터 너희에게 이미 예고하여 주지 않았느냐? 나는 예고하였고, 너희는 이것을 증언할 나의 증인들이다. 나 밖에 다른 신이 또 있느냐? 다른 반석은 없다. 내가 전혀 아는 바 없다.")
로마서3:30(참으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신(神)은 하나뿐인가?
모르긴 하지만 신(神)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고로 이 세상에는 많은 신(神)이 있다.
바알, 아세라, 엘, 브라마, 말둑, 르 등 셀 수 없이 많고 그 신(神)들의 이름은 연유와 까닭이 있다.
그 신(神)들의 이름도 그 신(神)들의 특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스라엘 신(神)도 이름이 있고 그래서 구약을 보면 나 여호와는 너희 신(神)이라고 말하고 있다.
구약에 수천 번 나온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신(神)들은 제각기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의 아버지 되시는 창조주에게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또 이름을 붙인다면 어느 나라 말로 붙이는가?
그런고로 창조주 하나님은 이름을 가질 수 없다.
만약 이름이 있다고 하면 그 신(神)은 잡신(神)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보낸 분에 대해서 내 아버지라는 말은 했지만 다른 이름은 쓰지 않았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된다.
이로써 이 세상의 잡신(神)과 창조주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와서 공생애 기간동안 아버지의 존재를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이렇게 창조주이신 예수님의 아버지에 대한 인식이 암흑 속에 있다는 것이 대단히 슬픈 일이다.
저는 이 성경을 보면서 항상 생각하는 것이 있다.
이 성경이 경전이라고 하지만 모순되는 부분이 있는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성경 책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책으로써 그의 가르침 속에서 진리의 근원을 발췌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