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교회
 
작성일 : 15-11-10 20:29
설교제목 : 선악의 고착성
 설교일자 : 1983.08.21
 KEY WORD : @@ 아들 아버지 죄 의인 악인
 성경구절 : 겔18:20
 관련구절 : 왕하14:6,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592  


18 죄를 지은 영혼 바로 그 사람이 죽을 것이며, 아들은 아버지의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가 아들의 죄에 대한 벌도 받지 않을 것이다. 의인의 의도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신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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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마태복음에서 신앙상의 혼돈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을 중심으로 설교했지만 기독교 경전을 전체를 두고 볼 때 대단히 곤란한 문제가 있다.

이 성경에는 여호와 신(神)에 대한 문헌과 기록의 분량이 대단히 방대하다.

구약 성경도 방대하지만 구약에 포함되지 않은 문서, 즉 외경이 이 구약성서의 두 배가 넘는다.

또한 그 기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1947년 사해 부근 쿰란이라는 동굴에서 이전 보다 더 많은 분량의 사본이 발견되었다. 

쿰란이라는 동굴은 일종의 큰 도서관이라 봐도 무방하다.

전통적인 이스라엘 신앙을 갈망했던 일단의 무리들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 구약을 연구하고 수호하고자 노력했고 훗날 이 공동체를 ‘엣세네파’ 라고 불렀다. 

그에 비한다면 신약성경은 그 양도 얼마되지 않고 또 외경들이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거의가 단편적이라 참고할 만한 것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즉 도마복음서 외에는 전부가 단편적이어서 큰 기대를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종교 가운데 이 여호와 종교만큼 기초가 튼튼한 종교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경 중에 예수의 말씀이 차지하는 분량은 어느 정도일까? 

이 전체 경전에 비해 백분의 일도 안 된다.

또한 복음서 중에서 ‘진리’에 관한 예수의 말씀만 추려보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오역(誤譯)이 되고 조작된 부분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누가복음에는 고의적으로 예수님이 하지 않은 말도 예수님이 말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 바 이렇게 문제점이 많은 복음서는 마태, 누가복음이고 비교적 문제점이 적은 것이 마가, 요한복음이다.

대단히 걱정되는 것은 이 구약이 외경과 함께 전체적으로 번역되어 읽혀져야 되겠고 또 예수님의 말씀은 저 구약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 인식되어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실정이고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제대로 밝혀지고 구별되지 않은 점이 매우 염려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는 여호와 종교이다.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종교이다.

우리가 이슬람교는 알라신(神)을 믿는다고 해서 알라신(神)을 다른 신(神)으로 알고 있지만 알라는 아랍어로 ‘그 신’ 이라는 뜻일뿐 ‘그 신’은 바로 여호와이다. 

알라에서 "알"은 신(神)이란 뜻이고 "라"는 정관사이다. 

이슬람교의 경전은 코란인데 거기에도 구약의 토라와 유사한 경전이 있으며 거기에서 알라는 창조주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신(神)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세 종교가 같은 신(神) 즉,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 신은 예수를 죽였다.

즉 예수는 여호와의 명령에 의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명령이 무엇인가? 토라(Torah) 즉 율법이다.

이 율법에 의해 예수님을 죽였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아무 죄도 찾지 못해 풀어 주려고 했다.

그러나 법정을 둘러 싼 유대인들은 우리들에게도 법이 있다고 외쳤던 것이다.

그들의 율법에 의하면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야 할 죄인에 불과 했다는 말이다.

또한 그 전날 가야바가 예수를 심문한 후 예수를 죽이는 것이 많은 백성을 위해 유익하다고 말했다.

가야바가 그 해 대제사장의 직분으로 있으면서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 것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여호와의 지시에 의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런 의미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여호와 법에 의한 것임은 분명한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여기에 덧붙여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하나의 변명(excuse)이 있다.

이 변명이 바로 기독교 조직신학의 기본 토대를 이루는데 다음과 같다.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을 지극히 사랑한 나머지 그의 독생자 예수를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값으로 대신하여 죽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런 의미이다. 

이 내용이 모든 기독교 교리의 대전제가 되며 또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인 것이다.   



이와 같은 교리를 갖게 된 것에는 그 원인과 이유가 있다.

처음에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갔을 때에는 그 제자들은 다 달아나 버렸다.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모든 기대가 끝났다는 심정에 비탄에 잠겼고 그러면서도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대부분 잠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했고 그때부터 제자들은 새로운 용기를 갖게 되었다.

부활한 예수가 오순절날 그들에게 성령을 베풀었을 때에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뭉쳤고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두려움도 잊고 생명도 내 놓을 정도로 용기백배 되어 예수님을 알렸다.

이것이 몇 해 동안 계속되는 동안에 부작용도 있었지만 그 부작용은 다음에 이야기하겠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오실 것을 확신하였다.

만약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예수가 오지 않을 것을 알았더라면 여러 가지 문제가 달라졌겠지만 그러나 그 당시에는 당장에 곧 올 줄 예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 년, 이년이 지나고 십년이 지나도 오지 않음으로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 해서 할 수 없이 믿음의 이론적 기초를 찾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복음서가 모두 예수님이 부활한 지 거의 40~70년 정도가 지난 후에 기록되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직후의 열정만으로는 더 이상 공동체를 끌어갈 수 없는 한계 상황이 도래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부활했다는 사실을 넘어 십자가에 못 박혔던 이유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논리 즉, 신학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기독교의 교리, 즉 예수님이 여호와의 명령에 의해 죽기는 했지만 그것은 여호와가 백성들을 사랑하는 나머지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자기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되었다는 이론이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대속론이다. 



바울서신 13권의 내용이 다 이 이론에 근거하게 되었고 바울의 이런 논리를 사도들도 옳다고 보았다. 

제자들이 바울의 논리를 옳다고 본 까닭이 있다.

제자들이 아무리 예수님이 부활한 것을 직접 보았지만 그들 역시 유대인인고로 자기들의 민족신(神), 여호와를 쉽게 버릴 수도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만 따르는 것이 힘들었고 그 신(神)을 포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빌립이나 가롯유다, 요한의 생각은 조금 달랐으나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예수와 여호와 신과의 관계를 바울의 관점과 같게 보았다고 추정된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기독교 사상의 핵심적 교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바울 사상의 핵심이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3년을 보낸 까닭은 이런 사상을 확립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된다.



또 바울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이런 신(神)학이론을 제시한 것도 아니다.

구약 레위기4~16장까지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사하는 방법이 나와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양이나 염소나 소를 잡아 여호와 앞에서 번제로 드리면 죄 사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 죽였던 양, 염소, 소에 비유했다.

그러나 양이나 소나 염소로서는 완전히 죄를 사할 수 없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예수님을 동물 대신에 제사를 지낼 제물로 바쳤다고 보는 사상이 오늘날 기독교의 핵심 이론이다.


레위기4:1~12(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어떤 사람이 실수로 잘못을 저질러, 나 주가 하지 말라고 명한 것을 하나라도 어겼으면, 다음과 같이 하여야 한다. 특히,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받은 제사장이 죄를 지어서, 그 벌이 백성에게 돌아가게 되었을 경우에, 그 제사장이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소 떼 가운데서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를 골라 속죄제물로 주에게 바쳐야 한다. 그는 그 수송아지를 주 앞 곧 회막 어귀로 끌고 가서, 그 수송아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다음에, 주 앞에서 그 송아지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받은 제사장이, 그 수송아지의 피를 얼마 받아서, 그것을 회막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제사장이 직접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주 앞 곧 성소에 친 휘장 앞에서 일곱 번 뿌려야 한다. 제사장은 또 그 피의 얼마를 회막 안, 주 앞에 있는 분향단 뿔에 돌아가면서 두루 바르고, 나머지 수송아지의 피는 모두 회막 어귀에 있는 번제단 밑바닥에 쏟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는 속죄제물로 바친 그 수송아지에서 기름기를 모두 떼어 내야 한다. 떼어 낼 기름기는 내장 전체를 덮고 있는 기름기와, 내장 각 부분에 붙어 있는 모든 기름기와, 두 콩팥과, 거기에 덮여 있는 허리께의 기름기와, 콩팥을 떼어 낼 때에 함께 떼어 낸, 간을 덮고 있는 껍질이다. 마치 화목제물이 된 소에게서 기름기를 떼어 낼 때와 같이 그렇게 떼어 내어, 제사장이 직접 그것들을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불살라야 한다. 수송아지의 가죽과 모든 살코기와 그 수송아지의 머리와 다리와 내장과 똥과 그 수송아지에게서 나온 것은 모두 진 바깥, 정결한 곳 곧 재 버리는 곳으로 가져 가서, 잿더미 위에 장작을 지피고, 그 위에 올려놓고 불살라야 한다. 그 수송아지는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살라야 한다.)



이제 여기서 볼 때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도 버릴 수 없고, 또한 자기 백성의 조상신(神)도 버릴 수 없고 해서 이 둘을 합쳐서 만든 논리가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여호와가 백성을 사랑한 나머지 독생자를 죽였다 하는 것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신학사조는 율법상에서도 문제가 된다.

이 제사를 지내는 제도가 광야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는 이 제사 형식이 그대로 잘 수행되지 않았다.

오늘 성경 말씀도 거기에 대한 해답을 우리에게 준다.



이 에스겔서는 다니엘서, 예레미아서와 같이 남 유대사람들이 바벨론 포로로 붙잡혀 가서 쓴 기록이다.

오늘 본문의 에스겔서의 내용이 무엇인가?

죄를 지으면 죽어야 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죄를 아들이 대신할 수 없고 아들의 죄를 아버지가 대신할 수 없다.

죄는 각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그런 뜻이다.



이 말은 에스겔의 말이 아니고 여호와가 직접 에스겔에게 명령한 말이다. 

그러므로 죄의 책임문제에 관한 에스겔서의 논지(論旨)는 각 사람의 죄는 다른 사람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백성의 죄를 양이 짊어지고 간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그들에게 안심을 주는 하나의 예는 되지만 사람의 죄를 양이 책임질 수도 없거니와 한 사람의 죄를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이 논리는 오늘날 상식적으로, 법률적으로도 그렇거니와 그 당시 이스라엘 율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즉 여호와의 명령에서도 아버지의 죄를 아들이 책임질 수 없고 아들의 죄를 아버지가 책임질 수 없다 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하여 죽었다 하는 것은 여호와의 정신과는 맞지 않는 천부당만부당한 주장일 뿐이다.

바울과 예수의 제자들이 오늘날 교회의 교리를 만드는 초석을 놓긴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의 명령에 반하는 이론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은 정신을 갖고 있는 성경구절이 여기 한군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곳에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명문(明文)으로 아버지의 죄를 아들이 대신할 수 없고 아들의 죄를 아버지가 대신할 수 없다 했다.

왜 아버지와 아들의 죄에 대해 언급했을까?

아버지와 아들이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물며 타인의 죄를 다른 사람이 어떻게 책임질 수 있다는 말인가! 

책임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했다는 바울의 희생제의(犧牲祭儀) 설은 구약의 저 말에 정확하게 위배되는 바울 개인의 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걸머지고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즉, 우리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우리의 병을 낫게 해주기 위해서,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말씀한 적은 있다.

예수는 분명히 의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부르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결론적으로 죄인이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 의로워져야 천국에 간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성경에 무슨 말씀이 있는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했다. 

그러나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이 세리 마태의 집에 있을 때 바리새교인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왜 저 더러운 죄인들과 음식을 같이 먹는지에 대해 시비를 걸었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런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너희들이 죄인이라고 보는 이런 자들을 부르러 왔다는 그런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 죄 곧 병을 고쳐 의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부르러 오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이 기독교 문서를 다시 정리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 세상 기독교를 올바른 모습으로 세우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분명한 사명이요 의무라고 본다.

예수의 말씀과 여호와 말의 차이가 철저히 규명되어야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이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구원의 길 또한 밝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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