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교회
 
작성일 : 15-10-15 10:16
설교제목 : 기독교의 새시대
 설교일자 : 1984.04.15
 KEY WORD : @@ 너희 세상 빛
 성경구절 : 마05:14
 관련구절 :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5,161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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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는 크게 봐서 4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 번째 그룹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이고 다음에는 서구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가 그것이고 다음에는 이집트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의 이란 이라크 부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교회가 그것이다.

그 중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 교회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대부분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이다.



그리고 지금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예수교라 하기보다는 바울교라고 불러도 될 만큼 바울사상에 충만한 종교이다.

3세기 이후부터는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종교 즉 바울의 종교가 주도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바울의 사상을 기초로 하는 서구종교가 정치와 결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때 교회의 힘이 너무 강해서 대관식 때 교황이 왕관을 씌워주지 않으면 왕으로 등극할 수 없는 시절도 있었다.



오늘날 기독교는 실제로 바울 종교라 보아야 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성경 가운데 바울 서신이 13권이나 되고 그 외에 히브리서, 야고보서, 요한 계시록, 베드로 전후서 등이 있으나 이것은 별로 우리들에게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있고 또 내용이 특별한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 바울서신이 기독교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당연하며 세계의 많은 신학자들이 바울서신의 연구를 통해 학위를 받았다.

그 중에서도 로마서가 중심이다.

따라서 이 로마서를 대단히 심오한 책이라 해서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 로마서는 횡설수설의 글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이스라엘의 구주이다' 라는 인식이 먼저 확립된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교회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전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나 평신도들 가운데서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얼마 후 이방 사람들에게도 전도가 시작되었고, 이후 차츰 교회 내에서 이방인들의 세력이 커지게 된 가운데 바울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활동을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 당시 주된 사상이었던 ‘예수님은 오직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메시아’라는 사상은 이방인들을 위한 전도의 명분에 있어 심각한 모순으로 등장했고 그래서 바울은 그 모순의 극복을 위한 자신의 가설을 확립했다.

그것은 신은 오직 이스라엘의 신 하나뿐이고 다른 신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신(神)은 무엇이라 말했는가?

그는 구약성경 곳곳에서 명백하게 ‘나는 다른 민족의 신은 아니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모순의 극복을 위해 또 하나의 가설을 세운 것이다.



즉 로마서11:17절에 보면 이방민족이 이스라엘 신(神)을 섬기려면 이스라엘화(化)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혈통으로는 유대인이 될 수 없지만 접붙임으로 인해 일종의 양자는 될 수 있다는 논리인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참감람나무 격인 이스라엘에 가지들이 많은데 그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지들이 꺽여 나가고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 격인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당해 이스라엘의 자손이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 신(神)을 이방 사람들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하는 것이 로마서에서 바울이 전개한 논리이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로 내려왔다.


로마서11:17(그런데 참올리브 나무 가지들 가운데서 얼마를 잘라 내시고서, 그 자리에다 돌올리브 나무인 그대를 접붙여 주셨기 때문에, 그대가 참올리브 나무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양분을 함께 받게 된 것이면,)



이것은 그 말만 읽어보면 그럴듯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이 말 가운데 큰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즉 바울의 설명에서 잘라 낸 가지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그들은 구원을 못 얻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지금까지 예수를 믿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여호와를 철저히 따른 사람들이다.

여기에 바울의 논리에 큰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다음에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바울이 부활론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다시 말하면, 한 알의 씨가 땅 속에 떨어져 죽으면 그 곳에서 새싹이 나온다.

그것이 부활의 이치라는 말이다.


고린도전서15:36(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씨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싹이 안 나온다.

씨에 배아라고 하는 것이 땅속에서 수분을 흡수해 싹을 틔우는 것이다.

그리고 배젖은 배아에 영양분을 공급한다.

땅에 떨어진 씨가 그대로 있든지 혹은 썩으면 싹이 나올 리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물학적 무지에서 기인한 바울의 말은 틀린 것이다.



또 한 가지 바울의 저 말과 유사한 예수님의 말씀이 요한복음 12:24절에 있는데, 그러나 그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 본향인 천국으로 가야지만 세상 사람들이 참된 생명을 얻게 되는 길이 열린다는 말씀이지, 부활론을 언급하신 것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말한 신령한 몸 (고전15:44) 이란 것은 죽어서 무덤 속에 있던 내 몸이 때가 되면 다시 살아나서 입게 된다는 몸인 것이다.     


요한복음12:24(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고린도전서15:44(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부활의 이치를 설명하면서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부활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바울의 부활론은 당시 바리새인들의 부활론과 차이점이 없으나 예수님의 부활 원리와는 분명히 다르다.

예수님은 특정인에 대한 부활을 말씀했다.

특정인이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옮겨가는 것을 부활로 설명했고 죽은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할 것으로 말씀하지 않았다.

바울의 부활론은 바리새교인들의 말과 일치한다.



또 하나는 바울 종교는 신앙을 강조한다.

믿음을 강조한다.

모든 구약시대의 제도는 폐기하고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그러나 믿음이란 인식의 토대 위에 서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식이 되면 믿지 말라고 해도 자연적으로 믿어진다.

그런 믿음을 가져야지 억지로 믿으려 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로마서3~4장에서 강조한 믿음을 살펴보면 믿음이 율법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즉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할례가 생기기 전에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즉, 율법에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즉 제도나 법은 먼저 생긴 것보다 나중에 생긴 것이 효력을 갖는다.

가령 어떤 법이 만들어져 실행되다가 문제점이 있으면 나중에 개정법이 나온다.

그러면 그 개정법은 시간적으로 나중에 나온 것이고 그것에 우선권이 있다.

이전의 법은 언제든지 새로 생긴 법에 의해 대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의 율법이 있기 전에 믿음이지 율법이 생긴 다음에는 믿음보다 율법이 우선한다. 

따라서 율법이 믿음보다 더 효력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나중에 생겼고, 그 이전에 믿음이 있어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로워졌음으로 믿음이 우선이란 바울의 논리는 잘못된 것이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이 생기기 전 믿음 밖에 다른 것이 없으니까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지 그것을 거꾸로 말한 것은 바울의 억설일 뿐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 구약성경을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안식일은 절대로 지켜야 한다.

다음에는 할례도 받아야 된다.

그것은 왜 그러 한가?

여호와의 율법이 제정(制定)되기 전에는 다른 기준이 없었으니 혹 믿음의 유무로 판단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율법이 공표(公表)된 이후에는 그 율법이 모든 생활의 규범(規範)이 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신이 제정한 율법은 사람이 개정하거나 폐기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억설을 했다는 것이 무리한 논리의 전개이며 무지의 소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바울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신봉한 기독교는 이상한 종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 이 기독교는 바울이 쓴 13권의 책이 중심으로 되어 있고 예수의 행적에 대해서는 네 복음서가 있는데 이 가운데 예수님의 직접 제자가 쓴 것은 두 권 뿐이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이 그것인데, 마가는 당시 나이가 어린 베드로의 조력자였고, 의사였던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며 또한 바울의 선교 동역자였다.

그래서 그가 쓴 누가복음은 희랍어 문법에 정통하였으며 수준 높은 헬라어로 기록하였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하지 않은 말들을 많이 삽입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복음서 안에서 예수를 인식하는데 있어 대단히 곤란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비교적 예수님 말씀의 원형을 알아 볼 수 있는 기록들이 비교적 많이 있기에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실재(reality)를 인식하는데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은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큰 불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울은 그의 13권의 서신에서 예수의 말씀은 단 한마디도 인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서신을 아무리 읽어 보아야 예수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더 말해둘 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 당시에는 적지 않은 복음서가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네권 밖에 전해지지 못했다.

그것은 로마 정부와 결탁한 가톨릭이 다른 지역의 교회세력들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그 지역의 문서들을 불태워버렸던 까닭도 있고, 또 한 가지는 다른 지역의 교회들은 그 세력이 약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잘 전달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라진 혹은 숨겨진 예수님에 관한 복음서들을 찾아내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죽지 않고 지금도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스스로를 빛이라 했다. 

이 빛은 전파의 일종이다.

이 전파는 파장의 속성이 있으며, 주파수에 따라서 어떤 곳이든 파고 들어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도우심을 따라 땅 속에 묻혀 있는 예수님의 복음, 바닷속에 있는 예수님의 복음, 하늘에 있는 예수님의 복음이라도 우리가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런 뜻이다.

우리에게 구약성경이 있는 것이 다행이다.

이것은 진리로서는 가치가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의 그 시대 사회제도, 정치제도를 알 수 있고 또한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가 하는 것을 참고할 수 있는 중대한 문헌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도 철두철미하게 연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학자가 필요하다 보는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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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의 새시대 1984.04.15 마05:14 관리자 5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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