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그 누이들이 사람을 예수께로 보내서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
04예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05예수께서는 마르다와 그의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06그런데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앓는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그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셨다.
07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 지방으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08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방금도 유대 사람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려고 하십니까?"
09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다니면, 햇빛이 있으므로 걸려서 넘어지지 않는다.
10그러나 밤에 걸어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걸려서 넘어진다."
11이 말씀을 하신 뒤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12제자들이 말하였다. "주님, 그가 잠들었으면, 낫게 될 것입니다."
13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그가 잠이 들어 쉰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14이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밝혀 말씀하셨다. "나사로는 죽었다.
15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 너희를 위해서 도리어 잘 된 일이므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 그에게로 가자."
16그러자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고 말하였다.
17예수께서 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 속에 있은 지가 벌써 나흘이나 되었다.
18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오 리가 조금 넘는 가까운 곳인데,
19많은 유대 사람이 그 오라버니의 일로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서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다.
21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22그러나 이제라도, 나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23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24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
25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26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27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28이렇게 말한 뒤에, 마르다는 가서,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서 가만히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와 계시는데, 너를 부르신다."
29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서 예수께로 갔다.
30예수께서는 아직 동네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다가 예수를 맞이하던 곳에 그냥 계셨다.
31집에서 마리아와 함께 있으면서 그를 위로해 주던 유대 사람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서 나가는 것을 보고, 무덤으로 가서 울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따라갔다.
32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33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함께 따라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다.
34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님, 와 보십시오."
35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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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를 통해 우리가 접하는 예수님 삶의 모습과 말씀은 비교적 간단한 것들부터 시작해서 대단히 심오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그 모양과 깊이는 다양하다.
오늘은 그 중에서 가장 간단한 부분만 예로 들어서 말하겠다.
첫째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와서 사람들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2:41~52절에 보면, 유월절에 어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부모를 따라 올라왔다가 하루 동안 홀로 예루살렘에 머물렀었다.
그리고 뒤늦게 그의 부모가 그를 찾았을 때, 예수께서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몰랐습니까?” 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2:41~52(예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는 해에도, 그들은 절기 관습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그런데 그들이 절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의 부모는 이것을 모르고,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을 갔다. 그 뒤에 비로소 그들의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그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여,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냈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 그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라서,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하였다.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그들에게 순종하면서 지냈다. 예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런 말은 의미 없는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말을 굳이 그곳에 기록했다 하는 것은 예수께서 어릴 때 아무런 이 세상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교육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각 지역마다 회당(會堂, synagogue)을 두어 그곳에서 자녀들을 교육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옛날의 서당과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곳에 다닌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누가는 아무런 의미 없는 사건 하나를 의도적으로 기록해둔 것이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배우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태복음13:54~58, 마가복음6:1~6, 누가복음4:16~30에 보면 예수는 말이 다른 사람들과는 많이 달랐고, 그래서 사람들은 목수였던 그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형제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놀라워했다.
그것은 한낱 시골 변방에 불과한 그곳 갈릴리에서 자란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놀라움의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배우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구절인 것이다.
세상 학자 누구도 예수님을 가르칠 수는 없다.
예수님이 그렇다면 또한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배워서는 천국을 찾지 못한다.
사람들로부터 배운 지식은 하늘나라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13:54~58(예수께서 자기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사람들은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지혜와 그 놀라운 능력을 얻었을까?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는 분이 아닌가?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지 않음 때문에, 거기서는 기적을 많이 행하지 않으셨다.)
마가복음6:1~6(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서 고향에 가시니, 제자들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어서,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 예수께서는 다만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 주신 것 밖에는, 거기서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마을들을 두루 돌아다니시며 가르치셨다.)
누가복음4:16~30(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는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 받아서, 그것을 펴시어, 이런 말씀이 있는 데를 찾으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 하고 말하려고 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지식을 가지고 자랑한다.
그런데 사람에게서 배운 것은 하늘나라에 가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거니와 또 도움이 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세상에서 얻은 지식은 사람의 생명과 관계된 특별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나 역시 특별히 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이 세상 학자들의 많은 학설을 답습해 보았지만 특별한 것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배운 지식은 천국의 이치를 깨닫는 것과 천국의 생명을 획득하는데 있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과 세상 사람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운 바가 없음을 정확히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에 세상으로 배울 것이 필요했다면 예수님도 회당에 가서 공부했을 것이다.
필요한 일이 있었다면 안 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필요치 않았기 때문에 안 한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요 형제 된 자라면 반드시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이 이 길이라고 하시면서 걸어간 그 길은 예수님만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우리들도 걸어갈 수 있는 길인 것이다.
그 길을 예수께서 마련해 주었다고 하면 우리 역시 그 길을 걷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 하는 사실은 그 길 중에 주요한 부분이란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가난했다.
거의 예외 없이 사람들이 물질을 추구하고 부유하게 살기 원하는 이 세상에서 그는 유독 가난했다.
마태복음8:20절에 보면, 예수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오직 인자만 머리 둘 곳이 없다 했다.
세상이 아무리 빈천(貧賤)해도 머리 둘 곳이 없는 정도로 빈천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빈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몸에 걸칠 의복 몇 벌과 기거할 거처는 있게 마련인데,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는 머리 둘 곳 조차 없는 극도의 가난한 삶을 산 사람이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의 소유라고는 단지 그가 입은 의복 한 벌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벗겨 로마 군인들이 제비 뽑기로 나눠 가졌다.
인자로 온 예수님은 그렇게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은 가난한 삶을 살았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에게 먹였던 그가, 또한 많은 병자를 고쳐주었던 그가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아야 할 어떤 이유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태복음8:20(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또한 예수님은 고독하셨다.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무지무심(無知無心)했다.
예수님이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예루살렘에서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고 사흘만에 부활한다고 했을 때 베드로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소서 했다.
이와 같이 베드로는 전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태복음16:22(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마태복음17:1~13절, 마가복음9:2~13, 누가복음9:28~36에 보면, 예수가 변화산에 올라가서 함께 간 모세와 엘리야로 짐작되는(제자들 생각) 두 존재를 불러 말씀을 나눈 적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을 예수님이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것을 보여준 까닭은 이렇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도 모세, 엘리야 하니까 두 천사를 불러서 그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세와 엘리야에게는 생명이 없고 배울 것이 없고 들을 것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그 셋은 모두 졸았다.
마태복음17:1~13(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이 눈을 들어서 보니, 예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하셨다.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확실히,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회복시킬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그를 함부로 대하였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제자들이 졸았다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예수님과 그 두 존재가 나누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흥미가 없었거나 혹은 자신들의 기대치와 달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 자신은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앞서도 말했지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다가올 자신의 운명에 분명히 말했을 때 제자들 중 누구도 귀 담아 듣고 깨달은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때의 예수님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 것이다.
오죽했더라면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를 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했겠는가?
베드로에게 하셨던 “사탄아 물러가라!” 라는 말보다도 예수님의 그 외로운 마음, 여러분 이 세상에서 자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 그 외로움이란 말로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 당시 베드로는 사탄 즉, 대적자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그 외롭고 답답했던 심정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생활은 가난했고 또한 외로웠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했던 요한과 야고보마저도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다.
마태복음20:20~28절, 마가복음10:35~45절에 보면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예수 앞에 데리고 가서 당신이 권좌에 앉게 되면 내 아들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누구로 생각했는가?
메시아인 줄 알고 따라다녔다.
메시아는 누군가?
바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메시아이다.
그래서 요한의 어머니는 내 아들 둘을 당신의 바로 옆 좌우에 서게 해달라고 예수께 간청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런 어리석은 부탁하는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도 분하게 여겼다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기가 막혔겠지만 그래도 책망하지 않았다.
다른 할 일이 있다 하는 정도로 끝냈다.
마태복음26:6~13절, 마가복음14:3~9절, 요한복음12:1~8절까지 보면 예수께서 마리아의 집에 갔을 때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위에 향유를 부었다.
그때 제자들이 화를 냈다.
이 사건도 간단히 보면 안 된다.
이 사건 역시 나사로를 살린 사건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제자들이 왜 화를 냈는가?
제자들이 화를 낸 낸 표면적인 이유는 값비싼 향유의 낭비였지만, 그 이면에는 마리아가 머리 위에 기름을 붓고 발에 입 맞추는 행위를 예수가 수용했기 때문이었다.
가롯 유다는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님이 과연 자신이 기다리던 메시아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어가던 중이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격분했고 즉시 제사장들과 내통해서 예수님을 넘겨주게 되었던 것이다.
마태복음26:6~13(그런데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는,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분개하여 말하였다. "왜 이렇게 낭비하는 거요?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을 텐데요!" 예수께서 이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치르려고 한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미래를 예지하는 느낌은 남자들보다 여자가 더 크게 가지는 것 같다.
마리아가 어떻게 그렇게 값 비싼 그 향유를 간단히 깨뜨릴 수 있었겠는가?
때마침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 여인의 마음속에 예감이 온 모양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리아가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청년 예수의 발에 입 맞추고 머리털로 그 발등을 씻었다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마리아의 그런 행위는 마음속에 켜지는 등불과 같았을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 마리아가 자신에게 해 준 그 행위는 이 세상에 왔다가 본향으로 돌아가는 동안 오직 한번 처음 맛보는 가장 큰 만족이었을 것이다.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이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이 없지 않았던가!
그런데 마리아가 그것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 일로 화를 냈어도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가난한 자는 항시 너희와 같이 있을 것이지만 이 여인은 지금 내 장사를 지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도 제자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진리도 가르침도 사람들이 깨닫을 수 없던 무지와 암흑의 세계에 그렇게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주변을 둘러싼 모든 세상이 그렇게 어두컴컴했다 그것이다.
다음에는 그는 피와 땀을 흘리도록 일을 했다.
노력했고 쉬지 않았다.
심지어는 안식일까지도 쉬지 않았다.
내 아버지가 안식일에도 일하시는 까닭에 나도 쉴 수가 없다 그것이다.
마태복음26:36~46절, 마가복음14:32~42절에서 보면 예수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특히 누가복음22:39~46절에 보면 그의 이마에서 땀이 핏방울처럼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인간도 심한 정신적 노동을 하면 얼굴에서 피 같은 땀이 난다.
보통으로 우리가 땀날 정도로 일한다 하지만 예수는 피땀을 흘렀다.
이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뿐 아니라 그의 일평생 일이라 하는 것이 피땀을 흘리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도 노력을 안 한다면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이 못된다.
과거에도 그렇지만 요즘도 예수님을 빙자하여 대접과 영광을 받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러나 그들의 걷는 그 길이 예수님이 걸었던 길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누가복음22:39~46(예수께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를 따라갔다. 그 곳에 이르러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하신 뒤에, 그들과 헤어져서, 돌을 던져서 닿을 만한 거리에 가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 때에 천사가 하늘로부터 그에게 나타나서, 힘을 북돋우어 드렸다. 예수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제자들에게로 와서 보시니, 그들이 슬픔에 지쳐서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들 자고 있느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서 기도하여라.")
다음에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아무런 조직을 만들이 않았다. 이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만일 예수님이 당시 직접 조직을 만들고 그 운영방안을 지시해 두었더라면 오늘날 세상의 교회는 저렇게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 와서 하나의 복음만 전했다.
그 복음은 새로운 세계가 생겨난다고 하는 그것이다.
과거에 없던 새로운 세계 즉, 새로운 창조(new creation)가 시작되었다는 소식만을 전했다.
예수님은 왜 그랬을까?
그것은 조직을 만들어도 그것을 감당할 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의 예배는 당시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행하던 예배의식을 그 전형(典型)으로 하여 생겨났다.
예수께서 전혀 그런 것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없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그리고 그에 걸 맞는 새로운 교회 조직과 예배의식이 마련되어야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 예수는 웃어본 일이 없다.
오늘 성경구절에서도 보면 그가 울었다 했다.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나 저 세계로 갈 때까지 웃음이 없었다.
오직 있었던 것은 피와 땀과 눈물이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께서는 왜 그의 무덤 앞에서 우셨을까?
곧 당신께서 일으킬 사람인데 슬플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우셨다.
그 울음은 바로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난 후 장차 이 세계와 인간들이 마주하게 될 비관적 운명에 관한 생각에서 흐르는 눈물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부모나 형제를 가지지 않았다.
요한복음7:5절과 요한복음19:26~27절을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
마태복음13:55~56에 보면 예수님의 남자 형제가 4명 있었고 누이도 2명 이상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변변찮고 보잘 것 없어 보였던 모양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본질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현재 신학자들은 야보고서의 저자로 알려진 야고보를 예수의 동생 야고보로 보고 있지만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유대 나라에는 형제라는 말 밖에 없다.
친형제와 사촌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척 중 한 사람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동생은 아니다.
그 증거가 요한복음19:26~27절의 기록에 있다.
거기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리아에게 요한을 아들로, 요한에게는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마리아를 자기 집에서 모신 것이다.
만약 마리아의 아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었던 동생이 있었다면 어머니인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했겠는가?
요한복음7:5(예수의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19:26~27(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제자에게는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부터 그 제자는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
마태복음13:55~56(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는 분이 아닌가?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여기서 또 하나 알아야 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낳아 준 마리아를 일러 “여인이여” 라고 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부모 형제가 없는 생활을 하였다.
우리가 생각하면 대단히 슬픈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머리 둘 곳도, 부모 형제도 없이 고단하고 외로웠을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우리에게 복음을 들려주었고 십자가를 통한 생명의 길을 친히 보여주신 것이다.
이상의 것들이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계실 적에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의 생애의 여라가지 단면들인 것이다.
우리는 보다 심원한 영적 차원의 문제들을 추구하기에 앞서 예수님의 그런 생애의 일단들 역시 분명히 인식하고 닮아가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