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교회
 
작성일 : 15-10-15 16:25
설교제목 : 필요한것 하나
 설교일자 : 1984.06.24
 KEY WORD : @ 마르다 마리아 염려 근심 한가지
 성경구절 : 눅10:38~42
 관련구절 :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066  


38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41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42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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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에 관한 기록은 사복음서에 모두 나온다.

마태복음26:6~13과 마가복음14:3~9에는 마리아가 나드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사건을, 요한복음12:1~9에는 이 두 자매의 오라비인 나사로를 살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오늘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다른 복음서에는 없다.


마태26:6~13(그런데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는,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분개하여 말하였다. "왜 이렇게 낭비하는 거요?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을 텐데요!" 예수께서 이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치르려고 한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마가14:3~9(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에 머무실 때에,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데, 한 여자가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이 화를 내면서 자기들끼리 말하였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그리고는 그 여자를 나무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요한12:1~9(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셨다.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에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곳이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나사로는 식탁에서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장차 예수를 넘겨줄 가룟 유다가 말하였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가 거기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크게 떼를 지어 몰려왔다. 그들은 예수를 보려는 것만이 아니라,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나사로를 보려는 것이었다.)



오늘 본문 42절은 몇몇 사본에서는 그러나 몇 가지 혹은 오직 한 가지만 필요하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UBS 사본으로 보면, “필요한 것은 하나이다. (마리아가 좋은 편을 선택했고, 그것을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있다.

내가 볼 때 ‘필요한 것은 하나이다’ 가 더 정확하다.



오늘 예수께서는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보통 잘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인간 생활에서 필요한 것이 어떻게 하나뿐이겠는가?

의식주만 해도 벌써 3가지나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 예수께서 필요한 것은 하나이다 하시면서 그 필요한 것 그 하나에 대한 부연설명이 없다.

그러므로 이 말을 자세히 보면 대단히 힘든 말이다.



마태복음6:25~34절과 누가복음12:22~31절까지 보면 예수께서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지 말고 걱정하지도 말라 했다.

너희에게 그런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없어질 들풀도 하나님께서 다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고 백합화 한 송이가 솔로몬의 영광보다 낫다 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세상살이에 필요한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은 분명 아닌 것이다.

세상살이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내실 적에 인간과 자연계의 모든 피조물들이 존속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마련해 주셨다.

그러므로 그런 걱정은 필요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 여기서 꼭 필요하다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이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태6:25~3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누가12:22~31(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은 음식보다 더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더 소중하다. 까마귀를 생각해 보아라. 까마귀는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또 그들에게는 곳간이나 창고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너희가 지극히 작은 일도 못하면서, 어찌하여 다른 일들을 걱정하느냐?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수고도 하지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의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풀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지 않으시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말고, 염려하지 말아라. 이런 것은 다 이방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오늘날 인간들에게는 필요치 않은 것들이 너무 많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내신 원칙을 어기는 일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멸망으로 치닫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아닌 듯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는 기도와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높여 달라는 기도 등이 모두 기독교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왜 그런가?

그것은 여호와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신인 여호와의 말이 기록되어 있는 구약의 창세기와 모세오경은 사실이 아닌 거짓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3:18절에 보면 여호와가 모세에게 나타나 장로들과 함께 바로에게 가서 “우리가 여호와께 가서 제사를 드리려고 하니 사흘 길을 걸어가서 광야로 가도록 허락해달라고 해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이 아닌 거짓이 명백하다.

여호와는 민수기14장에 의하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 민족을 끌고 다니며 애굽에서 나온 백성중 가나안 땅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트린 스무 살이 넘은 사람으로 인구조사를 받은 사람은 모두 죽였다.  심지어는 자기의 가장 유일한 종이라고 하는 모세까지도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죽여버렸다.

왜 모세를 요단강 동편에서 죽였는가? 

민수기20장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코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친 것이 주 원인으로 기록되었으나

실제로 여호와가 모세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닌 이유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자신이 모세에게 한 거짓말한 것이 들통나고 그것이 모세의 격렬한 반발을 살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여호와의 지시대로 이행한 모세를 죽일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출애굽기3:18(출애굽기3:18(그러면 그들이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또 너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데리고 이집트의 임금에게 가서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니, 이제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을 걸어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고 요구하여라.)


민수기14:29(너희 가운데 스무 살이 넘은 사람으로, 인구조사를 받은 모든 사람들, 곧 나를 원망한 사람들은, 이 광야에서 시체가 되어 뒹굴게 될 것이다.)


민수기14:37(그 땅에 대하여 나쁜 소문을 퍼뜨린 사람들은, 주님 앞에서 재앙을 받아 죽었다.)

                                                                                                                                                                                                                        


가나안은 이 세상에서 가장 척박한 땅이다.

애굽은 거기에 비하면 낙원이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 백성을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끌고 가지 못했다.

광야에서 일부 사람들과 광야에서 난 그 자손들만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들어간 것이다.

이와 같이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처음 약속한 것과 마지막에 실제로 이행된 것은 완전히 다른 모순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또 구약 예언서를 읽어보면 처음에는 나를 잘 섬기면 복을 준다고 해놓고 그 다음에 반드시 그 반대조건을 내건다.

나를 잘 섬기지 않으면 고통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백성이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그것은 나를 잘 섬기지 않고 내 명령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 준다 속여 놓고는 그 다음에 핑계(excuse)를 마련해 둔 것이다.

즉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고 나온 날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이 멸망하던 날까지 사실이 아닌 거짓과 각종 핑계로 속여왔던 것이다.

그런 여호와를 하나님이라 믿고 따르는 오늘날 기독교 역시 사실이 아닌 거짓과 핑계가 뒤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인들이 이 구약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저기서 각종 사고가 생기는 것이다.



교인들이 자기는 필요해서 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도 필요한 것이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으로 난 이상 뜰에 있는 백합화보다 낫지 않겠는가?

그런고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그런 것을 구하지 말라 했는데도 교인들은 기도할 때마다 그와 같은 것을 아직도 구하고 있다.

오늘 예수께서 마리아에 대해서는 꼭 필요한 것을 택했으니 아무도 그녀에게서 이것을 빼앗지 못하리라 말씀하셨다.

그러면 우리들이 보통으로 구하는 것이 아닌 꼭 필요한 것이 있는 모양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인생은 사는 것이 목적이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도 소용이 없다.

내가 있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지 내가 없는데 무슨 하나님인가?

예수께서 분명히 네 생명이 없으면 온 우주를 얻어도 소용이 없다 말씀하셨다.

즉 내가 살아야만 하나님도 있고 예수도 있고 이 우주도 있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예수도 나와 무슨 상관인가?

훌륭했거나 말았거나 모든 것이 내가 근본이다.

내가 있어야 한다.

내가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생명을 자기의 힘으로 보존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해준 어느 한계점까지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이란 하나의 동물이다.

개나 돼지와 똑같이 생물학적으로  동물류에 속한다.

가령 개의 수명이 20년이라고 하면 인간의 수명은 원칙적으로는 125세 정도이다.

125세까지가 생물학상 수명이다.

대개는 그 전에 죽는다.



죽은 다음에 영혼이 어디론가 가는가? 

인간이 죽으면 생물학적으로 끝나게 되어있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개나 돼지도 죽으면 끝난다.

인간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따라서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것이 인간이다.

개나 돼지나 모든 동물은 인간처럼 지능이 높질 않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할 수 있고 이성을 갖는 동물이다.

그런고로 자세히 보면 덧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쇼팬하우어는 인간은 늘 불행하고 고통스럽다 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뜻대로 이 세상에 나는 것이 아니다. 

자기도 모르게 이 땅에 태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해 보면 인간은 불쌍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운명을 타고 났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잘하면 125년까지 살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게 되어있다.



하나님께서 이 온 우주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그 통치자를 선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통치자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낸 특정 존재로 미리 정해 놓은 것은 아니었다.

독생자의 지위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 가운데서 특별히 자기 능력으로 쟁취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자격을 획득하신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늘날 전 세계 기독교가 이것을 모르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자격은 예수님 자신이 획득한 것이다.

사도 바울도 이점을 제대로 못 깨달았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에 있어 여러 가지 오류로 가득 찬 말들을 전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모든 보내심을 받은 자 가운데 유일한 존재 즉 독생자가 되신 것이다.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그 사자로서의 마지막 생활이 되는 사건이 바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마침내 그 사명을 완수하심으로 독생자의 지위를 획득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땅은 무엇인가?

인간을 살게 하기 위해 마련한 곳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예수님을 이 땅의 인간들에게 보내는 것이 이미 있었다 그것이다.

그런데 이 인간은 어떤 위치인가?

수학에서 면이나 선은 크기는 없다.

크기는 없지만 분명히 경계선은 만들어 놓는다.

기름 위에다 물을 부으면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물은 가라앉고 기름은 물 위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면 그 물과 기름의 경계선은 두께가 없다.

크기는 없지만 경계선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 위는 기름이고 그 밑은 물이다.

다시 말하면 이 땅 위에 사는 인생의 면이라 하는 것은 천국 즉 저 신성한 세계와 동물의 세계와 분명한 경계선에 있다 그런 말이다.



예수님이라하는 존재가 자기의 능력으로 모든 자격을 구비했지만 마지막 임계선까지 내려왔던 것이다.

현대 수학의 집합론에서 개(open)와 폐(close)면이 있는데 이 거룩한 세계에 대해서 인간이 사는 이 세계는 영계의 폐(close)면이다. close point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극치의 세계를 마지막으로 다시 정점의 세계로 올라 갈려면 바로 이 인간세계에 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 땅에 왔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완전한 인간이었다.

그는 인간으로 와서도 주어진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다.

그래서 그 결과 예수께서는 완전무결하게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관해서는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이전의 삼십 년은 비밀사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한 가지 일은 예수님은 사명을 완수하신 후 이 세상을 서둘러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생애가 그렇게 짧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고작 30세 전후로 이 세상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는 바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많은 인식력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자신의 저 본향으로 가시는데 어떻게 가시는가?

창세기에 나오는 애녹이나 혹은 선지자 엘리야처럼 육신이 승천하는가?

분명히 말해두지만 육신의 승천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한 법칙으로 보면 인간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난다.

그가 아무리 하나님의 독생자라 하더라도 인간으로 왔으면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렸다 하는 것이 그 사명의 하나로써 수행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반생물과 마찬가지로 죽으면 끝나는 운명은 될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본연의 상태, 천연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독생자의 자격을 완비하고 과거에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존재로 부활하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준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부활했다고 하면,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나도 부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말하자면 제2의 창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계나 물질계를 창조했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창조의 법칙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어떤 신(神)이나 어떤 영으로서도 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다.

새로운 법칙이다.

다시 말하면 나도 부활할 권리가 생겼다는 것인데, 그 근거가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내가 예수님과 같은 생활을 하고,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걸어가고,

예수님이 바라보는 관점대로 살고, 예수님이 염려하는 대로 살고,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걷는다면 나도 마땅히 부활할 권리가 있게 되었다 그것이다.

예수님과 다른 길을 간다면 몰라도 예수님이 걸어간 대로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부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도 영생할 수 있다.

나도 예수님처럼 영생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 하나는 영생인 것이다.

인간은 이 땅에 오래 살면 100년 정도 살다가 간다.

그러나 백 년이라는 시간이 이 우주의 전체 시간에 비교하면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이 지구도 역시 전체 우주의 크기로 본다면 하나의 점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의 진리는 수학적 언어로 표현되기 전에는 이해하기가 대단히 힘들다.

즉 인간은 이 땅 전체 중 하나의 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이 하나의 함수를 갖게 되면 수학상 술어로 말하자면 뮤(µ)를 갖게 된다.

이렇게 되어 이 세상에서 하나의 점에 불과하던 것이 저 새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는 죽음이 없다.

예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일종의 시적 표현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틀림없는 수학적인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이 합해서 우리 머리 속에 확고한 증명으로 성립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숙명적인 이 죽음의 세계를 벗어나 저 영생의 세계로 옮겨 가는 것이다.



나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마리아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제자들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고 본다.

그래서 이 중요한 말씀이 다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고, 누가복음서 역시 사본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빴을 것인데 마리아는 한가하게 예수님과 앉아 대화를 하고 있었으니 마르다는 몹시 언짢았을 것이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께 마리아가 자신을 돕게 하도록 종용한 것이다.

이 세상 보통 사람들은 늘 그런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마리아가 나눈 대화는 대단히 중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그녀로부터 그것을 빼앗을 자가 없다 말씀하신 것이다.

마리아는 다시 말하면 천국의 열쇠를 거머쥐고 있었던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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