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교회
 
작성일 : 15-11-03 20:45
설교제목 : 사랑은 할수 있어야
 설교일자 : 1990.01.28
 KEY WORD : @ 사랑 악인 선인 온전
 성경구절 : 마05:43~48
 관련구절 : 눅06:27~28, 32~36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277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47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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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사랑이란 말을 네 원수에게 적용하시어 쓴 곳은 오늘 여기 한 군데 뿐이다. 같은 계명을 구약의 말을 이용하는 중에 혹 사랑이란 말을 썼지만 자기 자신이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 세상 인간들처럼 쉽게 사랑이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로 알고 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믿음, 소망, 사랑은 항시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이다 말했고 고린도전서 13장 전체를 보면 사랑이란 말로 채워져 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예수께서 이스라엘 율법의 잘못된 것을 지적했다.

이스라엘 율법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는 미워하라 되어 있는데 이것이 구약의 기본 율법 중 하나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사랑한 사람만 사랑하고 그렇지 않고 자기를 미워하면 너도 같이 미워하라 이런 율법을 예로 들면서 이것은 잘못되었고 좋지 않다 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레위기19:18절 에 보면 '네 원수를 미워하라’라는 문구는 없어도 그 당시 유대인이 지니고 있는 개념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시어 말씀하신 것이며 신명기23:6절도 그 내용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즉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미워하라’ 는 그들의 개념을 지적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이 틀렸다 하는 의미로서 오늘 여기서 사랑이란 말을 쓴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님은 의식적으로 사랑이란 말의 제목을 가지고 말하지 않았다.

오늘 여기서 말한 사랑이란 말은 네 원수도, 내게 좋지 않은 사람도 내게 좋게 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랑해야 된다 그런 이야기이다.



레위기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신명기23:6

(네 평생에 그들의 평안함과 형통함을 영원히 구하지 말지니라)



그래서 예로 그 말을 잘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였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비를 선한자와 악한자에게 같이 내려주지 않느냐 또 햇빛을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춰주지 않느냐 그런고로 너희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해야 된다 하셨다.

너희도 완전해야 된다.

이 말씀에서 완전이란 말은 양적으로 한 말은 아니다.

이것은 질적인 말이다 본질적인 말이다.

하나님이 섭리하신 이 우주도 크고 완전해야 되겠고 이 세상도 비교적 완전해야 된다.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은 원자도 더욱 완전하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만들어 논 물건 가운데 가장 완전한 것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자 같은 것이다.

그런고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는 뜻이다.



우리가 아버지처럼 클 수가 없다.

그러나 조그만한 원자 하나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그것이다.

그런고로 사랑이란 특별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즉 사랑은 완전한 자의 자연스런 행동으로 나타난다.

완전한 자의 자연스런 행동중의 하나가 사랑이다.

그런고로 이것은 필수 조건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 얻은 사람, 하늘의 자녀가 되는 사람의 필수조건이다.

또한 자격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늘 하신 말씀이 이스라엘 율법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이런 가르침이나 이런 마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이다.

이것은 세상의 악신이나 또 인간적으로 졸장부나 하는 행동이니라 그런 말이다.



예수님이 ‘사랑’이란 말씀을 하신 요한 복음 15장 13절에 나오는 사랑은 능동적으로 사랑을 하라는 의미로 쓴 것이 아니다. 

사랑의 대표적 존재는 나다. 그런 의미로 예를 든 것이지 사랑을 하라는 명령이나 하나의 원리처럼 예수님은 사랑이란 말을 사용 안했다.

히브리말로 사랑이란 말은 아하바’ 인데 구약성경에서도 이 말만 나오며 신약의 ‘아가페는 ‘아하바’의 역어이다.

‘아하바’는 영어의 사랑(love)이란 말과 같이 하나뿐이다.

그러나 희랍어로는 4가지 정도의 다른 말로 사랑을 나타내고 있고 그래서 희랍어로 기록된 신약성서에서는 2-3가지의 희랍어의 사랑이란 말이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서 보면 "아가페"란 말이 제일 많이 사용되었고 필레오"도 사용되었으며 "에로"란 말과  “스톨게”란 말은 신약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요한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오늘 본문에서는 아가페로 사용되어 있다.

여기서 아가페란 말은 어떤데 사용되는가? 

‘존재 가치에 대한 사랑’으로 신약에서는 ‘인간의 사랑’ 및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대해 사용됐고 ‘필레오” 라는 말은 좋아한다는 말인데 우정,형제,지인 사이에서 느끼는 정과 사랑을 뜻하며 신약에서는 “예수님과의 사랑의 결속”의 의미로 사용됐다. 

그래서 소위 영어의 필로소피(philosophy)는 희랍어의 ‘필레오’ 라는 말과 소피아 (지혜) 라는 말이 합쳐져 만든 말이다,

그러므로 필로소피는 지혜를 좋아한다. 지혜를 사랑한다, 그래서 철학이라 한다.

또 에로라는 말은 남녀간의 사랑 즉 동물과 같은 사랑이다.

다음에 스톨게는 무엇인가?

이것은 윤리적 의미가 있다,

가령 부모를 사랑한다. 자식을 사랑한다.

이런 의미도 있지만 혹은 나라를 사랑한다는 의미로도 쓸 수 있다.



예수께서는 부활한 이후 갈릴리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질문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아가페로 되어있고 세 번째 사랑하는가 질문은 ‘필레오” 라는 말로 되어있다.

이것이 영어로는 다 Love로 되어있는데 내용은 다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네가 나를 사랑(아가페)하느냐 질문했을 때 베드로는 사랑한다고 대답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그 말을 잘 믿지를 않았다.

다시 말하면 인증을 안했다.

그래서 세 번째는 “필레오” 라는 말을 쓴 것이다.

“필레오” 라는 말은 네가 나를 좋아는 하느냐 즉 근본적인 예수님과의 사랑의 결속의 의미에 대해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인증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네가 나를 좋아는 하는 것인가? 이렇게 번역이 된 것이다.

이와같이 사랑이란 문제에 대해서 예수께서 말로써가 아니라 실질적 행동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즉 사랑이란 말은 언어로서는 ‘ ‘아하바’ 란 말 하나만 가지고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행동으로 말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 위쪽에 보면 사랑이란 말의 행동이 나온다.

사랑이라는 행동은 무엇인가?

누가 네 속옷을 원하거든 겉옷까지 벗어주고 또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까지 돌려대라.

즉 마태복음 5장 38절 이후의 말과 오늘 본문의 말이 계속 연결된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인 아버지께서 햇빛을 악한 자나 선한 자에게 같이 비춰주고 비를 악한자나 선한자에게 같이 내려주지 않느냐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관용을 말한다.

다음에 겉옷을 달라거든 속옷까지도 주라.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도 돌려대라 이것은 속옷을 벗으면 겉옷까지 빼앗기는 그런 비겁한 자를 말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도 돌려댈 수 있는 큰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즉 너그럽고, 관용이 있고, 힘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속옷을 요구하거든 겉옷까지도 줄 수 있는 너그럽고, 관대한 완벽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약자가 되지말라. 비겁하게 되지 말라. 능력의 소유자가 되라는 것이다.



마태5:38~42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는 악을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오늘 성경말씀 가운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즉 그와 같은 능력의 소유자가 되어야 되고 겉옷뿐 아니라 속옷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인내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여기서 사랑이라 말한 것은 하나의 예의로 말한 것이 아니다.

에티켓(etiquette)이 아니다.

이것은 능력을 말하고, 관용을 말하고 참된 힘을 말한다.

우리가 참된 힘과 능력이 있으려면 무엇을 가져야 하는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해야 한다.

즉 완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사랑을 이 세상에서는 잘 찾아보기 힘들다.

요즈음 사람들은 사랑이라 하면 하나의 에티켓 정도로 알고 있다.

하나의 의식으로, 예식으로 마치 여자들이 화장을 하듯이 하나의 장식으로 사랑을 하고 있다.

말로는 사랑이라고 떠들지만 속에는 진정한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



제가 아는 오래전 이야기로 사랑의 예를 들어본다.

일본에서 일어난 일인데 80여년 전의 이야기이다.

 이름을 잊었지만 어떤 기독교 학자가 있었다.

그는 외국에서 공부를 했고 가문도 좋았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성경도 열심히 연구했다.

이 사람이 생각하기를 예수님 믿는 사람으로 남을 구원할 능력을 가져야 그것이 예수님 믿는 열매로 생각했다.

그런데 자기를 가만히 보니 자기는 남을 구제한다, 남을 살린다는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것을 가지고 고민했다.

그 사람은 내가 여러 사람은 살릴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는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가 한 여자를 알고 있었는데 이 여자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 당시 의무교육인 초등학교도 3년을 다니다가 그만두었고 집이 가난해서 공장에 들어가 여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이 여자를 내 아내로 삼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내로 삼지 않으면 그 여자는 평생 시집을 못 갈 처지였다.

왜냐하면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얼굴도 못 생겼다.

그는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면 내가 저 여자 하나는 살리는 것이다.

최저 한 사람은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했고 그래서 그 집에 가서 그 처녀와 결혼한다고 하니까 그 집에서는 못산다고 무시하고 놀리는 것이 아닌가 해서 처음에는 곧이듣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번 간곡하게 청원을 하므로 그 집에서 허락을 했고 그 여자와 결혼했다. 

결혼 후 이 사람은 자기 아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부인도 남편이 진실되게 자기를 가르치는 것을 알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 남자는 기독교계에서 유명한 학자요 전도인이 되었고 그 여자도 노력하고 공부한 결과 얼굴도 천사처럼 변했고 그때 일본에서 유일하게 여자 죄수들에게 전도하는 전도사가 되었다.



또 하나의 예는 일차 세계대전 때의 일이다.

영국 군함이 독일함정의 폭격을 받고 격침되었다.

그런데 그 중에 두 사람이 하나의 조그만 널빤지를 붙들고 헤엄치게 되었다.

어느 정도 헤엄을 쳤지만 아직도 육지는 멀어 보였다.

즉 오랜 시간 헤엄을 치다 보니 두 사람 다 죽게 되었다.

한 사람이라면 널빤지 위에서 쉴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때 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널빤지를 양보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데 지금 죽더라도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 널빤지를 타고 가서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둘 다 죽게 된다고 하면서 그 널빤지를 놔버렸다.

이런 것이 크지는 않지만 사랑의 예라 볼 수 있다.



다음에 예수께서 말한 요한복음 15:13절에 기록된대로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다.

즉 너희를 위해서 생명을 바칠 것인데 너희도 나와 같이 행해주기를 바란다 하는 의미로 남겨주었다.

그런고로 이 사랑이란 어디까지나 관용이요 또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또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본능이다.

이것이 예의나 종교를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 이런 것 때문에 하나의 행동의 장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본능적으로 나와야 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했다.

이것이 바로 본능적으로 나와야 됨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설명했다.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고, 불의를 좋아안하고, 질투를 하지 않고 등등 말했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한 사랑과는 다르다.

이것은 하나의 문자적인 사랑에 대한 의무이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아니다. 이것은 피동적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한 사랑은 능동적이다.

사도바울이 말한 사랑은 자기의 의무, 즉 점잖은 태도를 가리킨다.

예수님이 말씀한 사랑과는 다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랑의 본능적인 행동(action)이 나올 수 있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뿌려준 씨가 자라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

그 씨가 자라야만 예수께서 말씀한 사랑의 행동을 할 수가 있다.

사랑은 내가 가진 능력의 발산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써 내 본질이 나타나는 일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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