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교회
 
작성일 : 15-10-15 16:49
설교제목 : 예수님 생애의 일단
 설교일자 : 1984.08.05
 KEY WORD : @@여우 굴 새 거처 아버지 장사
 성경구절 : 마08:18~22
 관련구절 : 눅09:57~62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588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 옆에 둘러서 있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셨다.

19 율법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2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21 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2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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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품이 비교적 낙관적이며 희망 속에서 늘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며칠 전 어느 날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내게 아주 절실하게 다가왔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나 역시 그런 형편에 있다는 자각(自覺:Self awareness) 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내가 늘 중요시하고 염두에 두는 것 중 한 가지는,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걸어가는 길과 삶의 모습 대부분이 반드시 예수님과 닮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생각해 보면 대단히 극단적인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셨다.

오늘 본문의 이 말씀은 적어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오늘 바로 나에게도 요구하시는 말씀임을 절실히 느껴야 한다는 말이다.

요즘 들어 내가 가끔 예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연구하는 나의 삶을 뒤돌아보면 그가 걸어가신 삶의 궤적과 나의 그것이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땅 위에서 머리 둘 곳이 없었다고 하셨다면 우리는 그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분명히 그를 낳은 어머니가 있었다.

또한 많은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평생의 불치병을 고쳐주었다.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려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이 없었다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 이 말씀은 상식적으로 보아도 심각한 모순이 있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기독교 이천 년 사에서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구절을 예수님의 과장된 말로 받아들였을 뿐 분명한 실상(實相)으로 인식하지는 못했을 것으로 본다.

예수께서 그런 형편에 처했을 만한 아무런 분명한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그리고 그 진실을 다시 한번 검토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서에서 예수님에 관한 기록들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가 눈물을 흘린 적은 있으나 웃은 적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활면을 숙고해 볼 때 인자는 베게 둘 곳조차 없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끌려가 재판을 받고 있을 때,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그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었는가?

또 그때 대제사장의 여종과 그 여종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너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 중 하나라고 말했을 때 베드로는 무엇이라 했는가?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베드로는 망설임도 없이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 했다.

어디 그뿐인가?

예수님은 그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서도 자신의 가르침과 행적에 대해 이해 받지 못했다

한 집안의 장남이었던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집을 떠나 있었을 때 마리아는 그의 동생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한 적이 있었다. (마12:46-50)

아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한 마리아의 목적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가3:22절에 의하면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를 잡으러 와서 예수님의 사역 중단을 요구하기 위함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마리아가 그의 동생들을 대동하여 예수님을 만나러 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리아 본인이 혼자 오거나 혹은 그의 동생들 중 하나를 보내면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과 그 친동생들의 소원했던 관계를 생각해 보아도 입증이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12:46~50 (예수께서 아직도 무리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와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습니다."] 그 말을 전해준 사람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그리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고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그리고 형제들과의 관계 또한 어떠했는가?

예수님의 형제는 남동생 넷(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과 여동생 둘이 있었다. (마13:55-56)

그런데 그 형제들 모두 예수님 생전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형제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집안 일은 돌보지 않고 엉뚱한 일로 소일(消日)하는 한심한 장남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 서로 격차가 큰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가 이해하기가 힘든 것이 현실인 것이다.

이제 살펴본 바대로, 예수님의 제자들, 부모, 형제들 그리고 그로부터 각종 혜택을 입었던 수많았던 그 사람들 중 누구 하나도 생전에 예수님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했던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예수님의 그 토로(吐露)의 말씀이 결코 과장은 아닌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등의 부류들과 늘 충돌했다.

그들은 늘 자신들의 근원을 모독하고 질책하고 비난하는 예수님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그렇기에 기회만 되면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한 구실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태복음13:55~56(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는 분이 아닌가?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이상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이 세상 어느 모로 보아도 잠시 마음 편히 쉴 만한 구석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 이스라엘 땅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었을까?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만약에 예수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예수님처럼 사람들에게 병든 자의 병을 고쳐주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며, 무지한 자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하면, 또 더 나아가 자신이 영생의 길이 되어 주었다 가정하면 그는 사람들로부터 융숭(隆崇)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해 주었던 그 예수님은 왜 이스라엘 땅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었는가 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주인이 분명한 땅이었다.

이스라엘 땅에는 뚜렷한 주인이 있다.

그 주인이 누구인가? 바로 여호와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신(神)이요, 이스라엘의 왕이요, 이스라엘의 아버지였다.

구약에 보면 여호와는 자신의 집이 예루살렘 시온에 있다고 했다.

따라서 이스라엘 땅은 여호와의 땅이다.

비록 마땅히 그 땅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아야 할 일을 한 예수님이었지만 그 땅의 주인이 바로 여호와였다는 그런 말이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이스라엘 땅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것이다.



비유를 들어 설명해보겠다.

서로 전쟁 상태에 있는 A나라와 B나라가 있는데, A나라의 병사 하나가 B나라의 핵심장소에 투입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적지에 들어간 병사에게는 머리 둘 곳이 있겠는가?

일각(一刻)도 그 땅에서는 머리를 두고 평안히 쉴 수는 없는 것이다.

24시간 내내 눈을 뜨고 적지의 상황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평안히 쉬는 순간에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베게 둘 곳조차 없는 그런 상태에 있었던 까닭은 그가 바로 적지에 왔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만약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신의 아버지 나라에 왔다 하면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그 말이 있을 수 있는 말이겠는가?

만약 형제의 집에 왔는데 머리 둘 곳이 없겠는가?

만약 친구의 집에 왔다면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그런 뜻이다.

예수님은 어머니도 형제도 제자들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의 위로가 되는 그들이 되어 주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늘 마치 적지의 한 복판에 들어간 병사가 항시 눈을 뜨고 지내야 하는 상황과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인자(人子) 예수의 생활이었다.



예수님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따라서 아버지 소유의 모든 것을 예수가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요한복음14:2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다.

그곳은 장차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 있게 될 곳이다.

그런데 인자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 당시 그 땅은 어떠했는가?

인자 예수님에게 있어 그 땅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그런 땅이었다.

그렇다면 이 땅은 바로 예수님의 아버지의 땅이 아니라 원수의 땅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요한복음14:2(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오늘날까지 기독교는 여전히 예수님의 원수를 예수님의 아버지로 알고 섬기고 있다.

대체 아버지의 집에 왔다면 아들이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 골자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에 덮개를 씌웠고 그 결과 지금까지 기독교에는 예수님이 없는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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