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것들을 모두 깨달았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예" 하고 대답하였다.
5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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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서기관이란 말은 학자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학자가 다시 말하면 연구하는 사람들이 옛 것과 새것을 구분하는, 새로운 것과 쓸모 없는 옛 것을 분간할 수 있는 것이 천국이다 그런 이야기이다.
이것이 천국의 일이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지금까지 기독교는 썩어빠진 것, 낡아빠진 것, 쓸모 없는 것으로 계승해 오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런 말을 했다.
그것은 천국의 진리, 천국사항, 천국에 대한 생명, 천국 가는 길 이런 모든 것을 알아야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는 진리이다라고 말했다면 그 진리의 내용을 알아야 되는 것이다.
생명이다 하면 그 생명의 이치를 알아야 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나는 수학이다 말했다고 보자.
그렇다면 예수님이 나는 수학이다 그 말만 알아서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 못 된다. 수학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이 수학이란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는 진리이다 그랬지만 진리에 대한 내용은 언급이 없다.
그 자체를 지금 세상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은 전부 진리인가?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어떤 부자가 예수께 와서 어떻게 하면 좋은 인생, 영생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했을 때 네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진리이냐 하면 진리는 아니다.
자기 가지고 있는 소유를 팔아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고 안 나누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꼭 나누어 주어야 된다는 이치는 없다.
덮어놓고 자기의 소유를 남에게 내 주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은 미친 행동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내게 준 큰 재산이 있다고 하자.
그 재산을 아무 사람에게나 나누어준다고 해 보자.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고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기록 되었다고 해서 다 진리는 아니다 그런 말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준 말씀을 분석해 보면 진리라 하는 문제에 대해 약간의 힌트를 언급하신 때는 있지만 진리의 내용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그것을 오늘날까지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모르고 있다.
예수님이 무슨 진리인지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예수님이 진리라 했다면 진리의 그 내용을 다는 몰라도 그 일부라도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새시대의 의무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 나름대로의 원리를 창설하였다.
기독교에 있어서 원리(principle)을 창설한 사람은 사도바울 뿐이다.
그 착안은 대단히 훌륭했다.
어떤 신학자는 이 세상에 사도 바울 같은 위대한 사람이 난 것은 기적이다 그렇게 말했다. 그만큼 사도바울을 극찬했다.
예수님도 진리의 내용에 대해 언급이 없었고 제자들도 그 원리에 대하여 이치에 대하여 말을 못했다.
단지 예수께서 말씀한 것 중에 좋은 말씀에 대해서 이것을 명령으로 생각하여 그 말씀을 따르려고 하는 노력은 있었지만 그러나 우리는 명령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따르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예수께서 하신 모든 말이 합리적이고 합당해야 되는 것이다.
강제적으로 강압적으로 요구한 것은 옛날시대의 구물일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도 언급하지 않은 또 어떤 제자도 내지 못한 원리를 신학원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바울이 만들어낸 원리를 크게 나누면 셋이다.
그 가운데 둘은 신앙의 힘(Power of faith) 이다.
구약에는 신앙이란 말이 없다.
약간의 믿음이란 말은 있지만 바울이 쓴 의미와 다르다.
예수께서도 믿음이란 말을 썼지만 그것도 바울이 말한 의미와 다르다.
바울은 자기의 독특한 믿음의, 신앙의 원리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신앙으로 의로워 진다는 것이다.
천국을 가는데는 의인이라야 되는데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 그렇게 말한 것이다.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근거는 구약성경에 있는 말을 인용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근거로 했던 것이다.
창세기 15장 16절, 창세기 17장 1~14절에 보면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줄 것을 약속했고 아브라함은 그 말을 잘 믿었고 또한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 했을 때 서슴없이 그렇게 바치려고 한 것을 예로 들었다.
그래서 그 믿음이 귀하다 칭찬하며 찬양하는 의미에서 네가 모든 백성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상도 주었고 너는 의롭다 하는 의의 징표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주창하는 바울 신학이자 신앙의 가장 기초이다.
믿음으로 의로워 진다는 학설을 창설한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는 이스라엘 민족神이다.
구약전체의 내용이 여호와는 이스라엘 神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아주 직접적인 언급이 있는 여호수아24:18, 아모스3:2, 에스겔37:26~28 여기에 보면 나는 이스라엘神이지 다른 백성의 神은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그 외에 나는 이스라엘의 왕이요 이스라엘의 아버지다. 그런 뜻으로 구약 전체에 이와 같은 내용이 반복해서 기록되고 있다.
바울도 여호와는 이스라엘 神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호수아24:18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모든 민족을, 이 땅에 사는 아모리 사람까지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모스3:2 (나는 이 땅의 모든 족속들 가운데서 오직 너희만을 선택하였으나, 너희가 이 모든 악을 저질렀으니 내가 너희를 처벌하겠다.")
에스겔37:26~28 (내가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튼튼히 세우며,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들 한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어지게 하겠다. 내가 살 집이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 성소가 영원히 그들 한가운데 있을 그 때에야 비로소 세계 만민이,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주인 줄 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사람은 믿음으로 이스라엘화 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神이지 다른 백성의 神은 아니기 때문에 누구든지 믿음으로, 신앙으로 이스라엘화 되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한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11:17~24절에 보면 그렇게 되어있다.
믿음으로 의로워진다 하는 내용도 로마서4:1~12에서 강조를 한 것이다.
또한 믿음으로 이 세상 어느 나라 백성이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있다 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방 사람을 전도하며 너희들도 믿어야 이스라엘의 혈통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바울의 원리 중 세 번째는 예수님이 사람들이 제사 때 쓰는 양과 같은 제물로서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희생양(Lamb of sacrifice)이라는 것이다.
이 세가지가 바울이 창설한 신학의 원리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에 대해 검토를 해 보아야 한다.
이 세가지 원리를 분석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2천년동안 이것이 기독교의 원리로 계승되어 오는데 이것이 옳다면 절대로 이것을 지켜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버려야 한다.
첫째로 믿음으로 의로워 진다는 말을 보자.
로마서 4장 1-14절 에 보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율법이 생기기 전이다. 그런 이야기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이방사람은 할례를 받을 수 없으니까 할례를 받기 전 아브라함의 믿음을 쫓으면 된다고 본 것이다.
또 의로워 진다 하는 것을 할례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도 바울이 해명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가 아브라함을 의롭다 판정해 준 것은 믿음으로 판정해 준 것이지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의롭다고 판정해 준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할례가 생기기전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법보다 믿음이 중요함을 로마서 4장에서 강조하는 것이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일종의 논문이다.
그런고로 신학의 주요원리는 로마서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따지고 보면 할례라 하는 법이 생기기 전에는 믿음이란 것이 주요했는지는 모르지만 법이 생기면 그 법을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하면 법도 새로운 법이 나오면 옛날 법은 자연히 폐기되는 것이다. 쓸모 없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스라엘 법이 생기기 이전 이야기이다.
새로운 법이 생기면 즉 할례라는 법이 생기면 이스라엘 백성의 표증은 할례를 받아야 되는 것이다.
바울이 이 말을 할 때는 이미 이스라엘 법이 있고 그래서 이스라엘화 되려면 이스라엘 법을 따라야 되는 것이다.
바울은 법적 이성이 부족 했음으로 이런 억설을 주장한 것이다.
로마서4:1~14 (그러면 육신상으로 우리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하였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을 은혜로 주는 것으로 치지 않고 당연한 보수로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비록 아무 공로가 없어도, 그의 믿음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그래서 행한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사람이 받을 복을 다윗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주신 사람은 복이 있다. 주님께서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실 사람은 복이 있다." 그러면 이러한 복은 할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내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리는 것입니까? 우리는 앞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브라함이 그러한 인정을 받았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기 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할례를 받은 후에 된 일이 아니라, 할례를 받기 전에 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라는 표를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얻은 믿음의 의를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으니, 이것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도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는 할례를 받은 사람의 조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걸어간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율법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약속은 헛된 것이 됩니다.)
다음에 둘째는 여호와는 이스라엘 神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인이 되어야 하는데 믿음으로 이스라엘화 될 수 있다 말한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 11장에 보면 나온다.
믿음으로 이스라엘에 접 붙힘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접 붙힌다는 말은 이스라엘과 혈통을 같이 한다는 말이다.
믿음으로 누구든지 이스라엘 혈통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실을 보자. 믿음으로서 흑인이 백인되고 백인이 흑인 되는가?
그렇다고 구약에 보면 혈통으로도 모두 이스라엘인이 안됨을 볼 수 있다.
구약에 보면 ‘에돔’을 보는데 에돔은 ‘에서’의 후손을 칭한다.
에서는 이삭의 자손이고 그러면 에돔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며 같은 혈통인데도 에돔 자손은 이스라엘인이 아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되려면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말할 때도 구약성경을 지키면 이스라엘인이 된다고 그렇게 했다면 어느 정도 합리적인데 믿음으로 접붙힌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소리이다.
믿음으로 혈연관계가 이루어 질 수가 없거니와 또 혈연을 갖는다 해도 이스라엘인이 되지 않는다.
야곱의 형제 에서의 자손은 아직도 이방인인 것이다.
차라리 율법을 지키면. 구약성경을 잘 지키면 이스라엘화 된다는 말을 했더라면 오늘날 교회도 차라리 이러한 패러독스에 갇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마서11:13~24 (이제 나는 이방 사람인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방 사람에게 보내심을 받은 사도이니만큼, 나는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아무쪼록, 내 동족에게 질투심을 일으켜서, 그 가운데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심이 세상과의 화해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들을 받아들이심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삶을 주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맏물로 바치는 빵 반죽 덩이가 거룩하면 남은 온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참올리브 나무 가지들 가운데서 얼마를 잘라 내시고서, 그 자리에다 돌올리브 나무인 그대를 접붙여 주셨기 때문에, 그대가 참올리브 나무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양분을 함께 받게 된 것이면, 그대는 본래의 가지들을 향하여 우쭐대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그대가 우쭐댈지라도,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래의 가지가 잘려 나간 것은, 그 자리에 내가 접붙임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고 그대는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옳습니다. 그 가지들이 잘린 것은 믿지 않은 탓이고, 그대가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끼지 않으셨으니, 접붙은 가지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넘어진 사람들에게는 준엄하십니다. 그러나 그대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이 그대에게 인자하게 대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았던 탓으로 잘려나갔던 가지들이 믿게 되면, 그 가지들도 접붙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수 있습니다. 그대가 본래의 돌올리브 나무에서 잘려서, 그 본성을 거슬러 참올리브 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면, 본래 붙어 있던 이 가지들이 제 나무에 다시 접붙임을 받는 것이야 얼마나 더 쉬운 일이겠습니까?)
셋째로 바울이 섬긴 예수는 여호와 神께 바치는 하나의 제물로서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죄를 지으면 성전에 가서 짐승이나 동물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법이 있고 일년에 한번씩은 제사장이 양위에 손을 얹고 이스라엘백성의 모든 죄를 양의 머리 위에 씌워서 밖으로 내쫓는 예식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형식을 갖추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카톨릭인데 그렇게 해서 백성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다.
그러한 제사법을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는 것도 여호와요 그리고 예수님을 여호와 앞에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해 제물로 바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스라엘에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예식은 없었다.
사람을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서 神에게 제물을 바친 예식은 실제로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중동지방이나 인도지방에서 볼 수 있었던 제사의 형식인데 바울이 이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아들을 바쳐서 제물로 드렸다는 기록은 없다.
이것은 일종의 이방 사람들이 신에게 제사 지내는 행사인 것이다.
바울은 구약이 아닌 이 세상 미신 종교에서 이 원리를 들여다가 예수님을 여호와 앞에 바치는 독생자의 제물로 원리를 세운 것이다.
이 원리는 지금 생각하면 대단히 부끄럽고 창피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일이 합리화되고 미화되어 있다 한심스런 일이다.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 납득할 수 없는 대단히 위험스럽고 부끄러운 사상이다.
오늘날 온 세계의 기독교가 이런 사상을 계승해 왔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와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나는 진리다. 명제만 주었지 나는 무슨 진리다. 말한 일이 없다.
그렇다고 하면 이전 주일에도 말했듯이 두드리라 혹은 찾으라 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을 요구한 예수의 말씀인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요구한 것은 내가 말한 진리를 발견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따라서 누구를 물론하고 각자가 모두 발견하기 힘들면 발견한 사람을 중심으로 토론하고 서로 논쟁하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여 다는 모르지만 그 초보적인 일부라도 진리라 하는 것을 우리는 발견해야 된다.
발견하기 전에는 그 길을 찾을 수 없다.
그 길을 찾을 수 없다면 폐물 밖에 안 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왔는가?
이 명제를 바울이 생각다 못해서 결국 이방종교의 사상을 빌어다가 예수님이 세상 온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신에게 바친다는 논리로 전개시킨 것이다.
우리는 지금 옛날 미개인이 쓰던 이상한 사상에 접목된 이런 것을 절대로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예수님은 왜 오셨을까?
여기에 우리의 구원의 문제 즉 영생의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이 왔다는 소리만 들어보아야 소용이 없다.
예수님이 어디서 왜 왔는지 이 이치를 파악하기 전에는 우리들의 정당한 신앙이 정립될 수 없는 것이다.
간단히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왔는가 설명해 보아야 여러분이 못 알아듣는다.
또한 간단히 설명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단지 한가지 힌트를 준다면 이렇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어 세상이 돌아 갈 수 있는 원리와 원칙을 세워둔 것이다.
땅 밑에 있는 벌레나, 공중의 새, 뜰에 핀 백합화라 해도 모두 자기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원리와 법칙을 주었고 사람에게도 어떻게 하면 살아갈 수 있는가 원리 원칙을 준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다 그 원리 원칙에 따라 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생물들에 준 생존의 법칙이다.
법칙 밑에서 살게 되어있고 그러나 하나님의 의사는 인간사회에 안 통하게 되어 있다.
의사라고 표현한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어서 말하는데 하나님의 의사는 인간에게 전달 될 수도 없었다.
예수님이 오기 전에는 하나님의 의사가 인간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전달될 수도 없었다.
또한 사람의 의사가 하나님께 전달될 수도 없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온 이후로 하나님의 의사가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고 인간의 의사가 하나님 앞에 전달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전달하는 이치를 알고 또한 그 길을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우리의 의사가 하나님 앞에 전달되고 또 하나님의 의사가 우리 앞에 전달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옮으로 말미암아 처음 인간 사회에 생긴 인간과 천국과 직결되는 하나의 길이 열린 것이다.
예수님이 온 이후로 비로서 이 길이 생긴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왔을까? 항시 생각하고 연구하고 노력하고 힘써야 된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