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0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0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보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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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인간은 거의 다 예외 없이 자기자랑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랑을 한다. 거기에다 과장을 한다.
심지어는 거짓을 덧붙여 자기자랑을 하는 것이다.
소위 학자라든가 정치를 하는 인간들은 대부분 제 자랑을 하는 집단들인 것이다.
무엇을 조금 더 안다고 자랑이며 자기가 최고라며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도 자랑하고 또 자랑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딘다.
이와 같이 인간들이란 자랑을 하고 싶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10원을 자선했다면 100원을 자선한 것처럼 자랑하고 천원 자선했으면 만원을 자선한 것처럼 과장하여 자기를 자랑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좋은 일을 했다는 것으로 복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화가 돌아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일한 것을 계기로 해서 거짓말을 한다든지 자기자랑을 과도히 한다면 오히려 화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심판 날에 화로 돌아오는 것이다.
여러분 백원을 자선 했는데 천원을 자선을 했다고 자랑을 하였다 하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기특하게 보일지 몰라도 장차 심판 날에는 그것이 증거가 되어 자기는 멸망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될 결과가 되는 것이다.
요사이 남미에서 해방신학이 대두되어 카톨릭의 분열이 일고 있다.
이 해방신학이 남미의 빈곤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희망이 되고 있다.
빈곤을 퇴치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본분인 것으로 떠들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공산주의와 결탁을 해서 사회를 혼란 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자비를 가져오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교주로만 아는 것 이것이 큰 잘못이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예수님을 그렇게 알고 있는데, 예수님이 불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준 것이 경우에 따라 있었고 또 그렇게 말도 해 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사랑에 대한 실천의 일부로서 이루어진 것이지 그것이 예수님의 근본적인 주된 가르침은 아니다.
내가 확실히 말해두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의 인간들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방법이라든지 다시 말하면 윤리나, 사회제도, 정치라든가 이런데 관해 일절 언급이 없는 것이다.
더러는 사람들이 예수께 이런 것은 어떻게 합니까? 저런 것은 어떻게 합니까? 질문을 했을 때 대답해 준 것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근본적인 가르침의 목적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의 근본적인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잘 살고 못살고 그것은 인간들의 책임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는 살 수 있는 방법을 다 마련해 주었다.
그런고로 인간 자체들이 그 마련해준 법도대로 살면 잘살게 되어있다.
그 법대로 못하는 것은 인간 자체의 책임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와서 이렇게 하면 잘 산다 저렇게 하면 잘산다 가르친 적이 없다.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요즈음 기독교가 그런 것을 모르고 예수님이 마치 사회개혁이나 유사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요즈음 기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르는 길로 인도하는 하나의 조직체가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이 천년 동안 기독교가 인류에게 공헌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해를 준 것이 더 많다.
그것은 예수님을 정확하게 모르는 까닭에 그렇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는 인간들이 잘살고 못살아가는 것은 인간 자체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인간자체가 자기의 책임을 못하고 있으면 그것은 장차 심판의 대상밖에 안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렇다. 이 세상 사람을 보면 자기자랑을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기도를 할 때 그 기도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다 듣도록 나타내 보였고 금식을 할 때에도 그 금식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한다는 것이다.
또 남을 도와주는 것 역시 자랑, 자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너희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 했는데 그런 짓을 하지 말라 하는 것이 근본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다.
그런데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라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의 말의 본질이 아니다. 하지 말아라 하는 것이 아니고 하지 않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랑하지 말라 기도한 것을 밖에 떠들고 자랑하지 말라 이때 자랑하지 말라 하는 것이 예수님의 본의가 아니고 자랑하지 않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리적으로 이와 같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데 하지 말라, 하고 싶은데 안한다 하는 것은 일종의 수양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세상에 와서 인간들에게 수양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수양이라 하는 것이 경우에 따라 필요 할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을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그런데 있지 않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와서 도를 닦는 다든지, 수양을 하거나, 학문을 하거나, 정치를 하거나 그런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말 가운데는 그런 부분에 대해 언급이 없다.
사람들이 물어오면 약간의 비슷한 말은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예수님의 근본 정신은 아닌 것이다. 그것을 모르면 안된다.
따라서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하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그것이 어떻게 되는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어떻게 왼손이 모르는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되어야 된다는 것은 결심으로는 안된다.
결심을 했다 해서 모를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느끼지 못할 정도까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생리적 현상으로만 가능하다. 자연적인 생리적 현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몸의 오른쪽 모기가 앉았다면 오른손이 올라가 이마에 있는 모기를 순간적으로 잡으려 한다.
이때 왼손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
오른손이 올라가는 것이 바로 생리적 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좋은 일을 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생리적으로 되어야 한다.
본질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 하니까 결심을 하고 안한다. 착한 일을 하라 하니까 결심을 하고 착한 일을 한다.
그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런 인간이 되어야 한다.
심지어는 내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있을 지라도 거짓은 안된다.
이것이 생리적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힘써서 노력해서 되는 것은 경우에 따라 약간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구원의 길로 들어 설수는 없다.
수양을 가지고는 그 본질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수양을 한다면 하나의 조그만 습성을 기르는데는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본질적으로 인간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 마라톤 선수가 노력을 해서 꾸준히 연습을 하면 조금 그 속도가 빨라진다. 향상되는 것이다.
처음 실력의 두배도 되고 세배도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한계 이상의 것을 이룰 수 없다.
마찬가지로 수영선수가 아무리 노력해도 물고기처럼 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신앙도 그렇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간다고 말하지만 구원은 믿음과 신앙으로 얻어지는 것 아니다.
믿음이라 하는 것이 조금 전에 언급했듯이 수양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잘못하면 이것이 오히려 구원을 얻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손해를 보는 것은 내 자신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생리적으로 근본적으로 달라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물을 낼 때에는 종류와 계급이 확실히 분간되어 있다.
개는 개고 사람은 사람이다. 개가 수양을 한다고 해서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인간에게 그 종류가 있다.
하나는 위에 속하여서 예수님이 내려주신 씨가 움트는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땅에 속하여 움이 틀 수 없는 인간이다.
두 가지 종류가 확실히 분간 되어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창조주가 만든 사물은 종류도 다르거니와 계급도 다르다.
그 관계가 다르다 처음 보기에는 꼭 같아 보여도 결과는 다른 것이다.
특별히 인간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오늘 아침 말씀한 것이 그 근본적인 핵심을 말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보통으로 두 종류, 두 계급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저 꼭대기, 위로 올라가는 인간 다른 하나는 땅속으로 내려가는 인간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 모양은 같다.
그렇지만 결과는 하나는 위쪽으로 올라가고 다른 하나는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여기서 위 아래는 사람의 윤리 관계나, 지식관계나, 돈이 많고 적음의 관계가 아니다. 바로 진리의 척도인 것이다.
마치 그 척도를 믿음의 관계로 말하는 것 자체가 크게 잘못 되어 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사람에게만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이것은 神의 작용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은 신은 예수님이 부활할 것을 몰랐다.
부활의 원리는 하나님의 비밀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이 부활이라는 새로운 원칙은 만물이 창조된 처음에는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인 神은 그것을 몰랐다.
예수님은 인간이기 때문에 죽이면 그만이다 생각한 것이다. 죽으면 끝나는 줄 알았다.
그 신이 부활의 원리를 처음부터 알았다면 예수님을 죽이지 않는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부활이란 원칙을 몰랐기 때문에, 인간은 죽으면 끝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죽인 것이다.
본래 인간은 죽으면 끝나는 것이다.
이 성경에 마태복음에 보면 부활이란 것이 처음부터 있는 것처럼 꾸며져 있으나 그렇지 않다.
부활이란 본래 없었다.
그런고로 인간으로 난 예수님이기 때문에 죽으면 그만이다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죽인 것이다.
그런데 부활이란 처음으로 생긴 새로운 원칙에 따라 예수님이 부활한 것이다.
부활이란 진리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온 뒤로 처음으로 생긴 창조의 원리이다.
신창조인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했지만 예수님을 죽인 신은 새로운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모르게 한 것이다.
예수님을 말살하는데 실패하였음으로 이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모르도록 하고 있다.
많은 기독교 단체들도 예수님을 모르는 종교집단으로 되어가고 있다.
말로만 예수, 예수하지만 실질적으로 예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잡아 죽인 신을 오히려 하나님이라고 떠받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을 알려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박해가 오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을 잘 깨닫고 믿으려 하면 각오를 해야 한다.
무슨 모양으로든지 박해가 올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를 질 각오를 가져야 한다.
이제 인간의 두 종류 중 하나인 예수께서 보내준 물과 공기로 씨가 움트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 인간은 위에 속해있다.
이 인간들의 고향은 위인 것이다.
이제 땅에서 난 인간과는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생리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저위에서 난 인간에 대한 하나의 예를 들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처럼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다 한 것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되어져야 한다.
자연적으로 생리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된다.
결심을 해서 누구에게 도움을 주고 그것을 자랑하지 못해 참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리적으로 남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위에 속한 인간은 그 보는 행동이나 보는 눈이나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달라진다.
수양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믿음으로 되는 것 아니다.
수양이나 믿음이라 하는 것은 이 속에서 내재적인 인간이 자라는데, 성장하는데 조금은 도움을 준다. 즉 속도가 증가되는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종류가 변경되는 것은 아니다. 믿음으로 그 본질까지 변경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너희가 하늘에 속한, 위에 속한 새로운 생리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