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교회
 
작성일 : 16-01-25 21:48
설교제목 : 생명을 주는자
 설교일자 : 1989.10.22
 KEY WORD : @ 죽은자 살리심 아들
 성경구절 : 요05:21
 관련구절 :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212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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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장 21절의 말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말 중 핵심적인 말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중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말씀도 있었겠지만 오늘 본문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 중 가장 핵심이 되고 근본이 되는 말씀들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이해하는 것이 우리자신의 근본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영어나 우리나라말의 번역이 불충분하다.
‘죽은 자’를 살린다 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그만큼 능력 있다, 힘이 있다 그런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의 능력이나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죽은 사람을 살린다 못 살린다 그런 것으로 표현되거나 측정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람 하나 죽고 살리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 인 것처럼 알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 말씀에 대한 진위를, 근본핵심을 현대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을 살린다 하니까 나사로를 살린 정도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의 원문을 다시 한번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일으켜야 하겠음으로 그래서 아들은 그 원하는 자들을 일으키리라” 이 말을 풀어서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살려야 되겠음으로 아들이 그것을 살린다.
다시 말하면 죽은 자를 살리는 원칙을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이다.
또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나(예수)다 라는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원칙을 내신 분은 그것을 발표하고 그런 다음 그 실천은 하나님이 한 것이 아니고 아들인 내가 한다는 것이다.
영어성경이나 우리나라 말 성경내용과는 다른 면의 근본적이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원리원칙을 하나님께서 정하셨다.
그러나 그 실천은 내가 한다. 내(예수)가 하는데 모든 사람에게 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원하는 자 그 일부만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죽은 자라 하는 말이 또한 중요한 말이다.
 ‘죽은 자’의 희랍 원어는 ‘네크로스   νεκρός ‘로서 신약성경 내에서 명사로 사용 됐을 때 ‘죽은 사람, 사자’의 뜻이 있고, 형용사로 사용 됐을 때는 ‘죽은’, '생명이 없는'의 뜻이며 본문에서는 명사로 사용 됐다.
또 다른 의미로 이 단어가 사용 된 것은 ‘생명이 없는 것들, 사물(死物)에 사용 됐다(로마 7;8참조) .
생물상태에서 생물상태에 있지 못하고 생명이 없어지면 그때는 사물(死物)이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죽은 자’는 생명이 없는 무생물 즉 사물’에 대한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은 삼단계이다.
첫째로 생물로 생겨난다.
다음에는 2차적으로 사물화 하는 것이다.
사물화(네크로스화)된 후 다음에 3차적으로 없어지는 것이다.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다.
처음에 생물로 낳다가 그 다음에 네크로스화 하고 다음에는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인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생물 상태로 태어나서 결국 생물상태에서, 무생물화 즉 네크로스화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물 가운데서 인자가 원하는 자, 인자가 필요로 하는 사람, 인정하는 자 이런 자들은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 말씀의 뜻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예수님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원칙을 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인자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바로 이것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물(死物) 들 가운데 필요한 사물은 그대로두면 없어지므로 없어져서는 안될 것들은 예수님이 선발해서 다른 세계로 이전해 옮기는 것이 의무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인간들 자체가 ‘네크로스화 되기 때문에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의 인간은 어떤 면으로 보면 다른 동물만 못한 것 같다.
다른 생물들은 창조주가 정한 대로 그 규칙대로만 살아간다.
즉, 각 동물본연의 본성으로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자신을 전혀 인식을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인간은 많은 神들의 막대기가 된 것이다.
모세가 여호와의 지팡이 되듯이 이 세상의 인간은 여러 귀신의 지팡이 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인간 스스로가 神들의 종 되기를 자처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왜냐하면 神들은 인간에게 복을 준다하고 명성을 원하는 자에게 이름을 높여주고, 돈을 바라는 자에게 돈을 벌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하며 인간이 원하는 것을 주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반면에 神들은 이런 것들을 이용하여 인간을 자기 종처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사회에 나타난 일이 없다.
내가 이전에도 말했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의 지혜나 지능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 학문으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세상 학문으로서는 정당한 인식과 판단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절대로 예수님을 알 수가 없고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세상에 나타난 일도 없지만 설혹 나타났다 할지라도 인간은 모른다.
그것은 인간들이 하나님과 이 세상의 거짓 신들과 분간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설혹 나타났다 할지라도 복을 준다거나 떡을 준다거나 명예를 준다거나 그런 일을 하는 분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神들은 예를 들면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애굽에서 끌어내면서 너희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다 한 것처럼 온갖 거짓말과 수단을 동원하면서 인간을 농락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인간들 자체도 그런 神을 원한다.
내게 떡을 주고, 젖을 주고, 명예를 주고 돈도 주고 하는 神을 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과 같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와서 “너희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 라고 했다면 이 세상의 인간들 중 십자가를 지라 하는 神을 따를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고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나타난 일도 없고 사람을 가르친 일도 없고,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아간 일도 없는 것이다.



인간은 神을 직접 상대할 수 없는 존재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은 생물로서 태어나한정된 삶을 산 후에 無生物화되고 그 다음에는 無로 돌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서로 대할 수 없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마지막날 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부를 추수해야 하는 까닭에 자기가 직접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대신에 예수님을보낸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神이 아닌 사람으로 온 것이다.
인간과 神은 그 세계가 다르다.
세계가 다르므로 서로 상대가 될 수 없고 인식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독생자 되는 예수님이 인간으로 온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와서 인간의 말을 사용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근본 원리의 일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고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되어진 것이다.
이제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아버지로 인식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알게 되면 예수님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고 그러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충분한 것이다.
그 이상은 네크로스를 일으킨 다음 저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인간으로 왔기 때문에 인간을 말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노력하면 예수님의 동료도 되고, 예수님의 형제도 되는 가운데 예수님을 인식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이다’라는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인간을 그대로 두면 생물상태에서 사물상태로 그 다음에는 무의 상태로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의 일부를 일으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예수께서 임의로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그대로 두는가?
그것은 저들 가운데 하나님의 씨가 있어 그 씨가 움터서 자랐다면 그것은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사물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것은 예수님이 원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필요로 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일으킨다는 것이다.



씨가 움터서 자라고 있는 것은 그 속에 새로운 생명이 존재한다는 뜻이고 예수께서 선택한 그 사람들은 일으켜 질 수밖에 없으며 일으킨 후에는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옮기는 것이다.
이 본문 말씀은 사물이 될 수 밖에 없는 인간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인식하고 그의 길을 걷는 자에게 새로운 생명인 씨가 움트고 성장되게 하여서 결국은 예수님에 의해 선택된다는 근원적인 핵심 말씀이다.
예수님이 뿌려준 씨가 움튼 사람이 저 세계로 옮겨진 후에는 되도록 빨리 ‘이 세상은 소멸의 길을 갈 것이다’라고 예수께서 또한 경고하신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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