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큰일을 했고 또 예수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께서 나는 너희를 모른다 했고 다음에는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나쁜일한 자들이다 말한 것이다.
이것은 심판 날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 앞에 온 사람들이 우리는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큰일도 했고, 예언도 했다 한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의 기독교의 본색을 들어낸 것이다.
지금 기독교에서는 예수님,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도 했고, 큰일도 했고 귀신도 쫓아냈고 그런 업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이 여기서 거짓말을 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의 이름으로 큰일도 했고 귀신도 쫓아냈고 교회를 크게 번창시켰다고 이야기한 것은 거짓이 아니고 사실인 것이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예수께서는 난 너희들을 모른다 한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말한 것이다.
이것이 문제이다. 어쩌면 좋을 것인가?
오늘날 세계 기독교 역사를 보면 꼭 이대로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큰 사업도 했고 또 종교지도자들 가운데 귀신을 쫓아낸 사람도 많은데 우리가 이렇게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 병도 고쳐주었고 귀신을 쫓아낸다 하는 것은 옛날식으로 말하면 병고치는 것이다.
또한 예언도 많이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 것처럼 느끼는 모양이다.
그러길래 마지막에 예수님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 많은 대중들은 이런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 앞에서 자신 있게 당당하게 이야기한 사람들에 대해 예수께서 잘했다, 고맙다 한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들 도무지 모른다. 그리고 선을 행한 것이 아니고 악을 행했다, 말한 것이다.
기독교의 2천년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인류에게 공헌할 만한 일은 별로 없다.
솔직히 보면 없다. 인간에게 피해를 준 것 뿐이다.
기독교가 공헌한 일은 적고 오히려 인류로 하여금 잘못된 길을 걷게 했다 보는 것이다.
지난 2-3백년전부터 과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인간들이 어리석은 기독교의 사상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렇지를 못했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 보면 여호와신이 해와 달을 만들어 하늘에 두고 해는 낮에 돌고 달은 밤에 돈다.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다 해서 믿었던 까닭에 갈릴레오가 지구가 태양을 돈다 말했을 때 그 사람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재판장에서 만일 네 말을 번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므로 죽기 싫어서 잠시 자기 말을 번복했지만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도는데" 하는 독백은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내가 이전에도 한번 말했듯이 희랍에서는 BC삼백여년 전에 벌써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학설이 있었다.
정확치는 않았으나 태양이 지구보다 3백배나 더 크다는 계산까지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뒤 이런 학설은 기독교에 의해 말살되어 버렸고 성경에 나온 대로 믿게 했던 것이다.
여러분 기독교 역사상에서 가장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십자군의 싸움이다.
십자군 전쟁은 무려 이백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십자군 전쟁으로 말미암아 유럽에서는 인류사회에 가장 더러운 징조들이 난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이라는 거룩한 성을 회복해야 되겠다는 뜻에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 결과로서 또 하나의 영향은 문둥병이 온 세계로 퍼진 것이다.
원래 우리나라등 동양에서는 문둥병이 없었다.
그런데 십자군 전쟁으로 이 병이 온 세계로 퍼진 것이다.
그와는 달리 십자군 전쟁이 인류사회에 공헌이 있었는가 하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도 기독교에서는 십자군 전쟁은 성전이고 큰일을 한 것으로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성경의 말씀처럼 주의 이름으로 큰일을 했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듣는다면 어떻겠는가? 잘했다 그럴것인가? 아니다. 나는 모른다 한 것이다.
또 악을 행하는 자들아 소리쳤고 그 다음에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심판이다.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성경구절을 보고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내 자신이 이런 처지에 있지 않은가 생각해야 한다.
내가 속한 교회가 이런 처지에 있지 않은가?
내가 속한 교단이 이런 지경이 아닌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자꾸 하나님을 아는척한다.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하나님, 하나님 이름만 부르면 아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가? 하나님이란 이름을 부르면 아는 것인가?
이 세상 쉬운 것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는가?
또 예수님은 어떻게 아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아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쉽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알겠는가?
우리 인간이 아무리 훌륭하고 머리가 좋다 해도 인간은 하나님을 모른다.
예수님이 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이 조금 안다 하는 것은 이 세상 떠돌아 다니는 神들이었다.
그 신들도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니까 인간들이 그것을 안다 하는 것이다.
여호와神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오랫동안 그 백성을 이끌어 주었지만 여호와란 이름은 모세때 비로서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神이 나타낼 때마다, 나는 너희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神이다. 너희 조상 야곱의 신이다.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구약 전체를 보면 나는 아브라함의 神이다. 즉 너희 조상들의 신이다, 말해주었던 것이다.
사람은 그 神을 분간한다 하는 것도 힘들다.
그러나 이런 여호와신 같은 것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사람과 같이 떡도 먹고 씨름도 같이하고 그러니까 어느 정도 짐작을 했지 인간이 하나님은 안다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예수께서 분명히 말하기를 너희는 하나님을 모른고 말씀하셨다.
단 한가지는 나를 알아야만 내 아버지를 알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첫 단계가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라 하는 분은 이름이 있을 수 없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름을 가졌다 하는 것을 그대로 믿는 것이 이상하다.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존칭으로 부르는 말이다.
하늘에 계신 분이다. 또 한 분뿐이신 분이시다해서 존칭으로 부르는 소리이지 하나님에게 이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요사이 세계 기독교가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인줄 알고 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하며 부르고 있는데 여호와란 히브리어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히브리말로 지어질 수 있겠는가?
히브리어가 아무리 거룩한 언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속성을 모르는 인간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이름이 지어질 수 없는 것이다.
예수라 하는 말도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축약형인 “예수아,Jeshus”를 코이네로 옮긴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한번도 부른 일이 없다.
성경책을 보라 예수께서 나 예수가 그런 말이 있는가? 예수님은 언제나 자기를 표현할 때 “인자다”, “사람의 아들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은 유대인 사회에서는 잘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인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왔다 하면 어떻게 이 세상말로 이름을 짓겠는가?
생각해보라 또 차라리 이 세상말로 이름을 짓는다면 이세상 언어 중에 가장 완벽한 언어로 이름을 지어야 할 것이 아닌가?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그리스도 다시 말하면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Ἰησοῦν Χριστόν)”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예수아’란 말은 “여호수아는 문자적인 뜻은 도움이시다”,”구원이시다”의 뜻이며 상징적으로 “승리자”의 뜻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이 말이 예수라는 말과 같아서 예수라는 이름을 예수님이 말한 것으로 제자들이 잘못 들은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예수, 예수 하면 마치 하늘에 통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이 세상말로 이름을 가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말했다 해서 그것이 천국에 도달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네 이름으로' 라고 말했는데 이때 이름이라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보면 실존이란 뜻이다.
히브리말로 ‘셈’이라 하는데 이 말은 실존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늘 네 이름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김서방 박서방하는 그런 이름이 아니다.
"나"라는 실존을 알아야 한다. 그런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라 하는 그 실존적 존재를 알아야 된다. 그런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이름으로 아무리 예수, 예수 해 보아야 필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세상 말로 그의 이름을 모르니까 편의상 예수라고 쓰고 있지만 그의 실존성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예수님 앞에선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른다.
그러면서도 예수님 앞에서 당신의 이름으로 큰 일을 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대접을 받은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 세상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목회자들이 성도들로부터 대접을 받고 자기는 마치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인간들을 속이고 있다.
왜 이렇게 되는가?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들이 자기자신이 거짓말하고 있다 느끼는 것은 아니다.
자기자신은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예언도 했고 그렇게 당당하게 예수님 앞에서 말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될까? 까닭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하늘나라에서 실격된 신들이 많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민족신 같은 그런 신이다.
그런 신들이 이렇게 모자라고 부족한 인간들을 자기 종처럼 부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마취를 시켜 예언도 하게 하고 조금 능력 있는 일도 하게 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늘에서 쫓겨난 신들의 종노릇 하는 것을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 뒤에는 반드시 실격 당한 신들이 있다.
여호와도 하늘에서 실격 당한 신이다.
또 여호와라 해서 혼자가 아니다.
거기에는 그룹(group)이 있다. 무리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원어를 보면 신들(엘로힘)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기독교 학자들이 신들이란 말을 가장 위대한 신으로 해석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속이는 행위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이런 신들의 수족 노릇을 하며 선지자 행세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접도 받고 윗사람 행세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분명히 말했듯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 외에는 없다.
지금 이 세계 기독교에 지금 십자가가 있는가?
어느 교회 어느 교단을 물론하고 십자가의 길이란 없다. 보이지 않는다.
그런고로 이 사람들이 오늘 예수님 앞에 나가 나는 주의 이름으로 예언도 했고 귀신도 쫓아내고 큰 일도 했다. 하는 사람들은 이세상에서 대접받는 사람들이다.
십자가의 길은 없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꼭 하나뿐이다.
이 십자가의 길이란 예수님이 만들어 놓으신 길이다.
예수님은 왜 이 길을 만들어 놓았는가?
이 길을 걸어 영생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함인 것이다.
인간들 자체로는 저 천국의 길을 갈 수 없다.
예수님은 그래서 이 길을, 십자가의 길을 만들어 놓았고 그 길로 따라오는 사람에게 영생이 주어진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 길을 가야지만 예수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상교회는 실격 당한 신들의 말을 믿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세상에서 대접받고 멋지게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서서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큰 일도 했다고 아무리 자랑해도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모른다 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은 사람들을 예수께서 알리 만무한 것이다.
어떻게 그들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예수께서 그 사람들을 향해서 이 나쁜놈들아 호통을 치신 것이다.
왜 나쁜 사람들로 평가를 내렸을까? 까닭이 있다.
내가 예언도 한다. 큰일도 한다. 귀신도 쫓아낸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예수님도 알아야 하지만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자기이다. 자기 자아를 알아야 한다.
자기를 안다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를 알면 자기 속에 있는 병을 알게 된다.
자기 속에 있는 병을 모르면 예수께서 고쳐주지 않는다. 고쳐준 일이 없는 것이다.
소경이 "나는 눈이 잘 보인다." 말한다면 고쳐 주시겠는가? 그런 사람을 고쳐준 일이 없다.
자기를 알아라 하는 말은 자기 속에 있는 결점, 즉 병을 알아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본 일이 없는 베데스다 못가에 일평생 누워있는 사람을 일부러 고쳐준 것은 그 본인이 자기 자신이 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자이다 알고 있었기에 그 사람을 고쳐준 것이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면 나는 예수님을 자연적으로 알게 된다.
그까짓 말과 이름을 써보아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아는 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자기의 결점을, 병고침을 받아보아야 한다.
나면서부터 소경인 자가 자기는 보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쳐주었고 그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도 몰랐지만 눈을 뜨고 나서 자기를 고쳐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먼저 자기 자아 속에 있는 죄를 알아야지만, 결점을 알아야만 예수님이 오셔서 나를 고쳐주신다.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아야 그분을 잘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아는 방법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알게 되면 비로서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는 인간은 먼저 자기자아를 알아야 한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