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교회
 
작성일 : 16-02-04 09:20
설교제목 : 승리의 예수님
 설교일자 : 1986.05.11
 KEY WORD : @@ 유다 입 칼 종 귀 열두군단
 성경구절 : 마26:47~54
 관련구절 : 막14:43~50, 눅22:47~53, 요18:03~12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014  


47 예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왔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그와 함께 하였다.

48 그런데 예수를 넘겨줄 자가 그들에게 암호를 정하여 주기를 "내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잡으시오" 하고 말해 놓았다.

49 유다가 곧바로 예수께 다가가서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하고 말하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50 예수께서 그에게 "친구여, 무엇 하러 여기에 왔느냐?" 하고 말씀하시니, 그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손을 대어 붙잡았다.

51 그 때에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손을 뻗쳐 자기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서, 그 귀를 잘랐다.

52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

53 너희는, 내가 나의 아버지께,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시기를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54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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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이세상에 왜 오셨을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오신 근본목적은 모른다.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시고 본향으로 돌아가시는 길에 우리에게 밝혀준 진리와 이치를 통해 그가 왜 세상에 오셨는지를 일부만 알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를 상고해 보면 그는 자신의 목적을 완전히 달성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목적이 무엇인가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목적을 완전히 달성한 것은 돌아가실 때 우리에게 남겨준 말씀, 그것으로 비추어 볼 때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실 때도 그러했지만 돌아가실 때도 오직 한 목표를 향해서 향진(向進)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참 이치의 길을 통해서, 참 이치의 목표를 향해서 매진해 갔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가는 길에 어려움이나 혹은 귀찮음이나 어떤 위험이나 그런 것들에 대해 일고의 고민도 하지 않고 오직 자기가 향해가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꾸준히 나간 것을 볼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간으로서 가졌던 오직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행하셨던 것이다.



본문에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잡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무기를 가지고 왔거나 권력의 힘을 가지고 와서 그를 붙잡으려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지금 아버지께 원하면 12영(營)보다 많은 군대를 가진 천사를 오게 해서 너희들 곁에 서게 할 수도 있다고 말씀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여기서 영(營)이라 하는 것은 그때 로마군대 레기온이라 하는 것인데 한영(營)은 약 6,000명의 보병과 120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12영(營) 이라 하면 약 72,000명의 천사가 이 땅에 내려올 수 있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큰 힘을 쓰지 않았다. 

오직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만 마지막 길을 걸어가셨던 것이다.



요사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태도는 전부가 달라고 하는 것뿐이다. 오직 구하기만 한다.

무엇 무엇을 해달라고 원하는데 당사자인 자신은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하고 있다.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구하기만 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길을 모르는 행위이다.



예수님은 12영(營) 군대를 불러서 저들을 섬멸할 수 있는 그런 권능이 있었고 말씀 한마디만 하면 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직 인간으로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정신과 지혜로 그것만 가지고 가야 되겠다는 목표를 향해 매진했던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하는 것의 핵심은 예수의 생활을 본받는 것이 첫째이다.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아야만 예수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과 한 형제가 된다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삶을 사는 방법, 사는 형태가 예수님을 모방해야 되는 것이다.

혹시 완전히 일치는 안된다 하더라도 수학적으로 상사형(相似形)으로라도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리의 목표를 항해서 매진하는 길에서 인간적인 능력 밖에 있는 외부의 원조를 받지 않았다.

심지어 하나님의 독생자였지만 하나님의 힘도 의지하지 않았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의 이와 같은 실천을 높이 지켜봐 주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분,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만 하는 사람은 그 믿음이 좋은 사람일 것이라 생각 하는가?

그런 믿음은 아무리 있어보아야 하나님께 대해서는 귀찮은 믿음일 뿐이다.

자기의 할 일은 조금도 하지 않고 달라고만 하는 것 그것은 예수님의 길과 다른 길이다.

예수님의 정신도 아니다.

예수님이 육체적인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힘이 있어보아야 그것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것 만으로 앞으로 나아가셨던 것이다.

이제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달성한 것이 얼마나 큰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본향으로 가실 때에 우리에게 보여주고 완성시켜준 것은 몇 가지 알 수 있는데



첫째로 그는 우리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보여주었다.

참 하나님을 보여주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었다.

하나님을 볼 수도 없었다.

수백 수십의 신들이 나서서 자기가 창조주다 능력 있는 신이다 하며 떠들고 돌아다녔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었고 하나님을 보여준 것은 오로지 예수님 뿐이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전혀 알 수 없는 하나님을 본향으로 돌아가시면서 우리들이 알 수 있도록 하게 했고 또 하나님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하기를 나를 본 것이 곧 내 아버지를 본 것이다 단정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전체를 다 볼 수 없지만 예수님을 인식하고 예수님이 걸어간 길을 밝히 파악할 수 있을 때 그것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그 정도의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둘째로 그는 진리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었다.

이 세상을 떠나는 길에 우리에게 진리의 문을 열어주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 하면 우리는 진리가 없는 암흑시대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도 진리의 문이 열려 있어서 우리는 희망찬 세계를 파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인간들은 진리의 문을 피해서 진리의 문을 떠나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 모를 정도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이 가시면서 지금까지 인류에게 닫혀 있던 진리의 문을 열어 주셨다.



셋째로 사람이 살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예수님이 걸어간 길 외에는 인간이 살 수 있는 길은 없다.

이렇게 저렇게 해보아야 결국 죽는 것뿐이고 멸망하는 것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학문을 해왔다. 

학문 중에서도 수학을 전공하고 있는데 그러나 현재의 수학을 가지고는 물질세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게 되어있다.

수학모델에 맞추어 자연계의 현상을 파악해 보려 하고 있지만 지금의 수학으로서는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지금 대체로 하는 것이 확률적이다.

그런 까닭에 이런 것으로 야기되는 결과가 무엇인가 하면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로 사건 같은 것이 그 하나이다.

또한 소위 지금은 우주시대라 해서 위성을 쏘아 올리고 있는데 가끔 아니 자주 사고를 일으키는 것도 바로 이런 물질세계를 정확하게 파악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요사이 소위 과학자들이 시험을 해서 진리를 탐구한다 하고 있는데 이런 시험을 가지고는 과학의 원 진리를 파악할 수 없다고 단언해 둔다.

지금과 같이 나가면 인류는 심히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잘못하면 인간이 순식간에 전멸하는 사건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고로 인간들이 지금 하는 일은 전부 죽어가는 길 외에는 별다른 삶의 길은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살길을 마련해 준 것이다.



네째로 예수께서 자기목적을 완전히 달성한 것을 알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0:17~18절에 보면 나는 내 생명을 거치(据置)할 수도 있고 다시 회수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즉 다시 찾을 수도 있다 말한 것이다.

여러분, 이런 성경구절을 읽으면 번뜩이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이런 성경구절을 읽고도 그저 좋은 말씀 이려니 하고만 있다면 우리의 공부가 너무 일천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내 생명을 거치할 수도 있다 그것은 또 모르겠다.

그럴듯한 말씀이라 생각 할 수 있지만 내 생명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씀은 진실로 인간적인 지혜로는 이해 불가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죽은 다음에 어떻게 자기 생명을 되찾을 수 있는가?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다 머리가 나쁘다.

그러므로 모순이 있어도 모순을 모르고 있다.

나는 생명을 거치(据置)할 수도 있고 다시 쟁취할 수도 있다는 말씀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생명을 다시 건지는가? 생각해 보았는가?


요한10:17~18(이 때문에 나의 아버지께서 나를 인애하는 것은, 나의 목숨을 다시 취하기 위해서 내 목숨을 거치(据置)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내게서 그것을 빼앗을 수 없으나 오히려 내가 내 자신으로서 그것을 거치(据置)하나니, 나는 그것을 거치(据置)할 권리도 가지며 또다시 그를 취할 권리도 가지노라. 이 사명을 내 아버지께 받았노라)



이 성경이란 책은 옳은 말 보다는 모순되는 말이 더 많은 책이다.

우리는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라 해도 틀린 말은 틀린 것으로 알아야 된다.

나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한마디라도 잘못된 것이 있다고 하면 오늘 즉시로 예수님 믿는 것을 포기할 것이다.

인간들은 좋은 말만 할 수 있고 혹 잘못된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조차 그러하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란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 즉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인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말씀 중 틀린 말이 있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은 아주 심각한 말이다.

내가 내 생명을 거치할 수도 있고 죽은 후에도 내 생명을 건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예수님은 내가 죽은 다음에도 내 스스로 내 생명을 찾을 권리가 있다는 그 말씀인 것이다.

죽은 다음에 내 생명을 찾을 권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살려준다. 그런 뜻이 아니다.



이것은 명백한 진리와 이치 속에서 되는 것이다.

내가 내 생명을 거치할 때 그저 거치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완수를 위해 내 생명을 던지게 되면 그 진리가 완성된 다음에는 그에게 돌아오는 응답도 진리 속에서 자연적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진리 가운데서 원리 속에서 거치한 그의 생명은 그 진리가 완수되면 스스로 자동적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셨다.

오늘 이 말씀은 대단히 심각하고 중요한 말이다.

그런데 지난 이천년 동안 기독교가 그것을 모르고 있다.

구약의 말을 완수하기 위해서 내가 간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완수할 수 있다는 원어는 "플레로오(πληρόω)"로 '이루다', '채우다', '충족시킨다'는 뜻이다.

쉬운 말로 말하면 그릇에다 물을 채우다 그런 뜻이다.

이 컵에 물을 채워 넣는다. 충만시킨다는 그런 말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성경에서 여호와가 말해 논 말을 여호와의 그 말, 그 이치, 그 목적, 그것을 채워준다. 그것을 달성시켜준다는 그 말씀이다.

그러면 무엇이 여호와의 말을 달성시켜준다고 하는 것인가?

내가 죽는 것이 구약의 말을 달성시켜준다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내가 하늘의 12영 군대를 불러 저들을 없애 버릴 수도 있지만 내가 구약의 말을 채워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말, 그 목적을 채워주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죽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말이나 여호와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라는 그런 뜻이다.

내가 피살당하는 것이 여호와의 말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예수께서 한두번 한 것이 아니다. 

성경에 여러 곳에 이 말씀이 있다.

그런데 이 세상 기독교가 이 말씀을 모르고 여호와신의 말을 하나님의 말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 얼마나 분통스럽고 억울한 일인가?

예수가 피살 됨으로서 예수가 죽어감으로 여호와의 말이 충족된다는 것인데 이런 충격이 없다.

그러면 여호와의 목적은 나를 죽이는 것이다. 그런 뜻이 된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여호와의 목적을 채워주기 위해 죽어갔는가?

하늘의 12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불러 무찌를 수 있다 하면서 왜 여호와의 목적을 채워주기 위해 그런 계획에 그대로 따라갔는가?

그것도 하나의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돌아가시는 길에 선과 악을 철저히 가려낸 것이 예수님의 목적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신(神)도 선과 악을 가릴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는 악한 도적놈들이 성인자리에 올라 앉아있고 의인이 짓밟혀 머리조차 둘 곳이 없는 상황이 비일비재한데 세상은 그런 곳이다.

그런데 이 세상의 인간들뿐만 아니라 神들의 세계조차도 선과 악은 분간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구약을 보자 이해하기 힘든 말들이 많은데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그 말을 옳게 보고 있지 않은가?

내용상 많은 부분이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신성시되고 옳은 말로 취급받고 있다는 그런 뜻이다.

그런고로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이 세상에 잡신이나 악신과 동거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는 어느 것이 죄이고 어느 것이 선이며 어느 것이 정의이고 어느 것이 불의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다는 그런 뜻이다.



이제 예수님의 죽음으로 무엇이 확고히 들어 났는가 하면 인간은 물론이고 이 세상을 주관하던 신들의 죄상마저 드러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세상의 죄 가운데 가장 무서운 죄가 예수님을 죽인 죄인 것이다.

이스라엘 신(神)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었고 노아의 홍수 때 노아를 살렸고 착한 아브라함의 친구였음으로 자신은 착한 신(神)이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한 죄는 이 온 우주를 가지고도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죄인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님은 그 죄의 근원을 하나님 앞에서 명백하게 들어내기 위해 그대로 순응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업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무엇인가 하면 죄와 의(義)의 경계를 그어 놓은 것이다.

그 경계선은 무엇인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것 보다 더 큰 죄가 없다.

이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인간이나 그 신(神)은 그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義)의 세계가 어느 것이고 어느 것이 죄의 세계인가 하는 것을 신들과 우리 앞에 확실히 보여준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께서는 삶과 그의 돌아가신 것 이 모든 전부가 그가 하신 일로서 모두가 성공이었고 승리였던 것이다.



그를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 예수님을 죽인 후 자축 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결과는 예수님의 승리였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대로 그대로 다시 사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승리의 삶 자체였다.

이제 우리들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승리의 생활을 쟁취해야 할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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