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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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는 바울 서신 가운데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다.
또 신학자들이 가장 어렵게 다루는 책이 로마서이다.
그런데 로마서를 많이 읽어보면 그 핵심을 파악할 수가 없다.
또 로마서는 핵심이 무엇인가 인식할 수가 없는 책이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힘들다고 하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연구한 바로 보면 로마서를 쓴 바울은 정신분열증에 걸린 환자라고 생각 될 정도로 그 중심이 애매한 사람이다.
오늘 읽은 성경구절을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단계는 율법은 자연적인 율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율법인 구약성경은 자연적인 율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없이도 양심적으로 율법에 대한 것을 지킬 수가 있고 지키면 율법을 행한 것이 되고 또 율법을 가지고도 율법에 위배되는 일을 하면 그는 율법에 의해서 죄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이 없이 율법에 위배되는 죄를 범하면 역시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사람에 대해서는 율법이 없어도 양심이 깨끗한 사람은 율법에 대한 것을 지키게 될 것이고 또한 지키게 되면 율법이 없이도 율법을 행한 것이 된다는 그런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그때 당시의 로마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사람이 혼합해 있는 교회였다.
그래서 이방사람에게도 적당하게 유대인에게도 적당하게 말해야 했지만 그러나 핵심은 유대교이다.
유대교를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다.
내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단 한마디도 인용하지 않았다. 분명히 알아야 된다.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큰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세상교회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다.
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몰라서 이용 못했는지 또는 이용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이용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인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발견하고 크게 놀랐다.
바울은 구약성경은 많이 이용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은 단 한마디도 인용하지 않았다.
자기가 쓴 책의 첫머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 말 한마디만 올려놓고는 모두 자기주장 뿐이다.
자기의 이야기인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율법은 자연적인 법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본성에 최선을 나타내는 그런 좋은 법률이라는 것이다.
그런고로 율법이 없이도 율법에 있는 것과 같은 법을 지킬 수도 있고, 율법이 있어도 율법에 있는 대로 행할 수가 있고 또 할 수가 없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율법은 자연적인 하늘이 내려준 자연법칙이라는 것을 주창하고 있다.
이것은 율법을 이방인에게 강요하는 말이다.
이 율법을 자세히 연구해보면 자연적인 법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이 율법의 가장 중요한 것이 안식일이다.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는 것이 율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 해서 잡아 죽인 것이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우리 인간 본성에 대한 기본적인 법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본래 안식일이란 아브라함이 살았던 그 지방, 지금의 이란 이라크 지방에서 5일에 한번씩 쉬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을 본떠서 유대인들이 7일에 한번씩 쉬는 날로 정한 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안식일이다.
그래서 이 안식일의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서 6일 동안에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을 나열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안식일이 우리 인간의 양심이다 하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소리이다.
어떤 특수한 사람 가운데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자연적일지 모르지만 "안식일이 사람이 난 본연의 양심이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이것이 율법에 쓰여 있는 한 가지 예이다.
다음에는 이스라엘 율법 가운데는 할례를 받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신과 인간 사이의 약속이 할례인 것이다.
할례라 하는 것은 남자의 생식기를 난지 8일 만에 돌 칼로 그 겉을 자르는 행위이다.
요즈음의 포경수술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이라 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이런 법이 어떻게 자연의 법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안식일이나 할례라 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바울이 믿으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받는 것처럼 된다 했지만 그것은 억설이고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믿는다는 것과 할례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할례라 하는 것은 인체에 표를 받는 것인데 마음속으로 믿는다는 것을 가지고 할례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에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 율법에서는 여자와 어린 아이는 사람 취급을 안 한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여자와 아이는 제외하고 5천명이라는 말이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율법에서는 여자는 제외했다.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자연적인 법이 될 수가 있는가?
다음에는 이스라엘 율법에서는 모든 것이 희생이다.
다시 말하면 짐승을 가지고 神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근본사상이다.
인간의 자연적인 법칙이 전부가 제사가 주관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주장이다.
제사라 하는 것은 미개인이나 야만인이나 혹은 어떤 특수한 종족들이 자기들의 습관대로 행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런 제사로 사람을 잡던지 짐승을 잡던지 하는 그것이 어떻게 자연적인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잡아 제사를 지내려 한 것을 두고 큰 믿음의 표상이라고 말하지만 자기 아들을 잡아 제사 지내려 하는 것이 어떻게 자연적인 일인가?
여호와가 그런 명령을 한 것도 아무리 시험한다 하지만 그것은 악神의 행위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고 있지만 그런 하나님은 배격해야 한다.
네 아들을 잡아 제사 지내 달라는 명령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모르지만 적어도 神의 말이라 하면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고대 야만인들은 소나 돼지를 잡아 제사를 지내는 것에 만족 치 않기 때문에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잡아 제사 지내는 것이 가장 신성한 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율법이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자연적인 법이 될 수가 있는가?
다음에는 이스라엘 율법에는 이스라엘 사람들만 사람이고 타 민족은 개로 취급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두로 시돈 지방에 갔을 때 거기 이방여자의 아이가 병들었는데 그 여자가 와서 고쳐달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상위에 있는 음식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말을 했다 하는데 예수께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네가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씀 하신 것이다.
무엇인가 하면 그 여자는 예수님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보고 있는데 유대인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을 개에게 줄 수 없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사상이다.
그것을 이방사람들이 다 알고 있고 유대인들은 당연히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음식도 이방사람과 같이 먹지 않는다.
율법에 그렇게 써 있다.
그것은 왜 그런가. 개와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것을 네가 알고 있는가? 그렇게 질문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되지 못한 이스라엘의 율법을 네가 알고 있는가 질문했고 그러면서 알면서도 나를 보고 이 아이의 병을 고쳐 달라 하는가 묻는 것이다.
그때 그 여자는 그런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상에서 떨어진 떡은 개도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개라 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아이의 병을 고쳐준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이 네가 알고 있는가? 질문한 것이다. 알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방여인을 개로 보았다면 병은 고쳐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방여인의 아이를 개로 본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율법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만 사람이고 다른 백성은 개다.
개와 같이 취급하고 있는데 이런 것이 어떻게 자연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가 그런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사람만 사람이고 다른 백성은 다 개라면 개를 왜 만들었는가?
이것이 자연의 법이 될 수 있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스라엘 율법은 자연적인 법칙이라고 주장 했다.
누구든지 양심대로 그것을 지키면 그 법을 지키는 것이 된다는 것이고 인간으로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것이 이스라엘 율법이라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바울이 말한 것은 예수의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고 유대나라의 율법을 찬양한 것이며 율법을 강요했던 것이다.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면 이 율법이 절대적이라고 주창할 만 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머리가 나쁘고 유치해도 이것이 절대적이다 그런 점을 발견할 수가 없다.
구약의 율법은 원칙이 없다.
원칙이 있다 해도 희생 혹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 정도인데 그것이 자연적인 인간이 반드시 걸어가야 될 만한 그런 원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소위 도그마틱(dogma)하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요한 것은 바울의 주장인데 터무니없는 논리인 것이다.
두 번째 단계로 바울의 이야기는 엄청나게 놀랄만한 말이다.
이제 읽은 마지막 절에 무엇이라 했는가 하면 나의 복음 즉 자기 말이 복음이란 말이다.
요한복음이나 마태복음이 아니고 나의 복음이라 한 것이다.
나의 복음은 내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은 주요한 천국의 소식이란 말인데 나의 복음 그런고로 이 기독교 가운데 무엇이 복음인가 하면 예수님이 말씀한 것이 복음이 아니고 바울이 오늘 아침 말한 대로 내 말이 복음이며 로마교회에 보낸 내 편지가 복음이다 그 말인 것이다.
나는 오늘날 기독교인 가운데서 이 말을 의문시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못 보았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의 말 할 것 없이 똑같이 복음으로 취급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내 말이 복음이다 내 말이 구원 얻는데 절대적이다.
예수님의 말이라던가 다른 말은 복음의 가치로 인정 안 하는 것이다.
다음에 더욱 놀랄만한 말은 내 복음에 따라 예수님이 장차 심판하리라 그런 주장이다.
원어대로 보면 내가 써 논 글에 의해서 이것이 법률인데 예수님이 장차 내 말에 의거해서 심판을 하리라 한 것이다.
그러면 복음을 보낸 내(바울)가 근본이고 예수님이 심판하리라 한 것은 예수님은 내 사자이다. 내 심부름꾼이다. 그런 말이 된다.
이런 엄청나고도 놀랄 만한 기록을 보고도 오늘날 전 세계 교회가 느끼지도 못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내 말에 의해 예수님이 장차 심판하리라 하였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말했는가 보자.
요한복음 8:11절과 12: 44~50절까지 보면 나는 심판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너희들이 설혹 내 말을 안 지킨다 해도 나는 심판 안 한다. 혹 내가 심판하더라도 내 심판이 잘못되지 않고 올바른 것이지마는 그러나 나는 심판 안한다고 말씀 하셨다.
또 예수께서 말세에는 심판이 사람이나 누가 인위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내 말에 의해 심판된다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 말은 진리라는 뜻이다.
진리에 입각해서 진리에 의해 자연적으로 심판된다 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복음에 따라 예수님이 장차 심판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내 명령대로 심판하는 심판관이 된다 나열한 것이다.
로마서를 읽어보면 이것이 예수님과는 상관없는 글이지마는 이렇게 터무니없는 글이 있고 이것이 또한 오늘날 기독교의 핵심교리로 등장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기독교가 어디로 가겠는가?
요한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한12:44~50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기독교의 진리를 깨달으려면 그것이 세상과학보다 더 깨닫기 힘들다 하는 것을 알아야 된다.
그러나 이 세상 보통사람들은 종교를 갖고 쉬운 神을 믿는 것이 편하다 생각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아는 것이 보통의 노력으로 알 수가 없다.
현재 기독교는 대중의 神을 믿고 있고 쉽게 믿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고 있다.
그것이 예수님의 아버지 神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 노력해야 알 수 있는 분이다.
바울의 말에 따라 심판할 그런 분이 아니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