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교회
 
작성일 : 16-02-04 10:01
설교제목 : 신자의 거처
 설교일자 : 1989.12.10
 KEY WORD : @ 양 목자 문지기 목자 권세
 성경구절 : 요10:01~18
 관련구절 :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310  


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0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0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0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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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직책은 두 가지로 표현되어있다. 

하나는 양들을 위한 목자이고 다른 하나는 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직책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들에 대해서 목자의 직책을 수행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문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 문은 절대적이다.

우리가 천국을 들어갈 때 예수님의 문을 통과하기 전에는 절대로 출입이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문지기라는 것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정한 천사라 말할 수 있겠으나 정확한 표현은 없다.

문지기가 예수님 외에는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열어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문을 열려고 많은 존재들이 노력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그 울타리를 넘어 올려는 자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자들은 다 강도요 도적이라 말한 것이다.

여기서 강도요 도적이라 하는 것은 인간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먼저 온 神들은 말하는 것이다. 

나 먼저 온자는 다 강도요 도적이라 한 것이다.



예수님 전에는 많은 神들이 이 세상에 내려 온 것이다.

무엇 때문에 왔느냐 하면 인간을 농락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을 자기들의 손발과 같이 이용해 왔고 또한 대접도 받은 것이다.

인간들이 어리석고 미련한 까닭에 떡을 준다, 복을 준다, 생명을 준다 하는 것에 속아 왔으며 그 결과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항상 격분할 정도로 느끼며 생각하는 것은 이 기독교라 하는 종교가 인류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이다.

한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권력과 부, 명예를 독차지한 로마교황의 권위까지 가지면서 이세상에서 인간에게 남겨준 공로 보다는 해를 준 것이 더 많은 것이다.

예를 들면 십자군 전쟁이 근 200년간 지속되면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또 이 세상이 도덕적으로 부패된 것이다.

또한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는 까닭에 오랫동안 암흑의 생활을 한 것이다.



지금부터 2300여년 전에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오기 전에 희랍에서는 이미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학설이 나왔던 것이다.

단지 측정기가 불완전해서 수치로는 정확치 않았었다.

예를 들면 그때 태양의 크기가 지구의 300배 정도로 계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양이 지구보다 크고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세계의 중심에 서면서 창세기의 내용을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까닭에 이와 같은 사실을 다 무시해 버리고 지구가 돈다고 말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오백여년전 갈릴레오가 지구가 둥글고 자전을 하며 또 태양을 돌고 있다고 했을 때 교황청으로 불려 들어가 종교재판을 받고 이 말을 취소하지 안으면 죽이겠다고 한 것이다.

결국 그 말을 취소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근 이 천년 동안 인간들로 하여금 소경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오늘날도 그러한 일들이 별반 줄어든 것 같지 않다.



지금도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바치라 강요하고 있다.

십일조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神 여호와가 명령한 것이다.

자기 소산의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때 이스라엘 나라에서 행하는 세금제도로 그렇게 잘못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스라엘 사회가 정치가 없고 神이 임금 노릇하고 통치자 노릇하기 때문에 세금으로 바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가 이것을 요구하는 것은 강도행위나 비슷하다.

이것을 성경의 의미도 모르고 예수님의 정신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모습인 것이다.

내 보기에는 저 같은 인간들은 천국이 하늘의 별보다 많이도 갈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여기에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한 말씀은 대단히 중요하고 심각한 것이다.

예수께서 나는 목자다 하였다.

그러면 목자는 양에 대한 목자인 것이다. 

이 양들은 하늘 나라의 자손을 말한다.

이 자손들을 먹이고 길러주고 인도하는 것이 목자인 것이다.

그런고로 나는 목자다 이것은 나 외에는 목자가 없다는 것이다.

또 내가 목자로서 세상에 왔는데 내 먼저 온 많은 神들 그들은 인간을 노리고 온 神들인데 예수님은 이들이 모두 강도이고 도적이란 것이다.



이제 하늘나라의 자손들, 양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이라 하는 목자의 인도 밑에서 살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목자가 있는데 그 목자의 음성을 알 수가 있고, 그의 음성을 분간 할 수 있고 그를 따라가며, 그를 따라가야만 꼴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꼴이라 하는 것은 생명의 양식이란 말이다. 

양이 먹는 음식인 것이다.

이것은 다른 데서는 얻을 수 없다.

오히려 무엇이라도 타인이 가지면 빼앗는 것이 강도요 도적놈의 특징이다.



이제 이 양들은 그 거처가 둘인 것이다.

거처가 둘이지만 이세상 사람들은 모른다.

이 세상은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문노릇 하는 그 문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울타리가 되는 문인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도 그 울타리 속에 있어야 한다.

울타리 속에 있어야만 이 세상의 강도요 도적이라는 神들로부터 나를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강도요 도적한테는 저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이다.

그런고로 들어갈 수가 없다. 

울타리를 넘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넘을 능력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하늘의 자손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그냥 세상을 버려진 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마련해준 울타리 속에 우리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악한 강도나 도적들에 해를 받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울타리 안에는 아무도 넘어 올 수가 없고 단지 예수님만 그 울타리 문을 열고 들어 올 수 있는 것이다.

문지기는 오직 예수님에 한해서만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안에 있는 양들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고 또 목자이신 예수님은 각 양들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한 것이다.

이름을 부르면 그 양들은 목자의 뒤를 따라 가는 것이다.



계속해서 보면 너희들 즉 양들은 나, 목자를 알아야 된다 하셨다.

어느정도 알아야 되느냐 하면 내가 내 아버지를 아는 정도로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대단히 심각한 말이다.

내가 아버지를 알 듯이 너희도 나를 알아야 된다. 섣불리 알아서는 안 된다.

일반 종교에서 인식하고 있는 예수님 정도로 알아서는 안 된다.

이름만 예수 예수하고 예수 이름으로 빕니다. 했지만 실제로는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만큼 너희도 나를 알아야 되는 것이다.

이세상의 지식도 완전히 아는데 힘들다. 하물며 예수님을 아는 것을 이세상의 학문을 아는데 비교하면 몇 배 몇 백배 더 힘드는 것이다.

예수님을 아는것은 그 길이 너무 길고 그 폭이 너무 넓고 그 높이가 높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저는 쉬는 시간이라는 것이 정신적으로 보면 별로 없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에도 반드시 성경문제를 하나 가지고서 잠드는 시간까지 그것을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 주요한 것을 발견하곤 한다.

우리는 이세상사는 동안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해준 말씀에 대해 다 알 수가 없다.

예수님을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저 세계에 갔을 때의 일이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와서 해주신 말씀은 얼마 되지 않은데 이 말씀 정도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 세상에 제대로 전해 졌는가를 보아야 하고 또 다르게 전해지고 있다하면 그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거처가 두 단계라 함은 어제 이야기했던 대로 예수님만 들어올 수 있는 울타리 속에 있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우리를 불러내었을 때에는 그 다음의 세계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그날부터 우리의 모든 것이 확고히 보존된다. 침해를 받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오늘 예수님이 분명히 말해준 것이다.



다음에는 이제 이 울타리 속에 있지 않더라도 같은 무리가 있는 것이다.

울타리 안에 있는 무리와 한 무리로 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그 말인 것이다.

여러분 이 얼마나 심각하고 중요한 말인가?

다시 말하면 이제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에 내가 아버지를 알 듯이 너희도 나를 알아야 되느니라 이것이 한 무리이다. 

이 무리는 울타리 속에 있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목자의 음성을 알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울타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존재가 있다.

그리고 이 울타리 내에 있지 않은 존재로 부른다는 것이다.

이 무리는 현대 종교식으로 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씨의 원리로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 이 첫 무리는 근본적으로 씨를 갖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아는 무리인 것이다.



다음에 둘째 무리는 울타리 밖에 있고 씨만 갖고 있는 무리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영향을 못 받고 있지만 씨가 자라고 있는 무리이다.

씨가 자라야 구원의 문제가 해결되므로 결과적으로 마찬가지인 것이다.

단 한가지는 울타리 속에 있는 무리들은 시간적으로 그만한 혜택을 더 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세계에 가지전에 예수님을 알고 예수의 생활도 하고 예수님의 역할을 하고 예수님 대신에 의무를 다하고 이 세상 악한 神들을 향해서 예수님의 대신 역할을 하고 있음으로 그만큼 프라이드도 갖고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을 직접 들어보지 못했고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지마는 내속에 천연적으로 하늘이 내려준 씨가 자라고 있으면 이 씨도 우리에 있는 자란 씨와 마찬가지로 저 세계로 옮겨지는 것이다.

우리 밖에 있는 다른 무리는 그 씨가 자랄 수 있는 옥토의 소재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도 저 세계에 갈 때에는 같은 무리가 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또한 다른 양 무리는 지구상에 있지 않은 우주 넓은 어딘가에 있는 무리도 포함될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예수님은 씨를 거두는 것이 목적이다.

자라고 있는 씨를 거두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 알아야 할 사항은 씨는 무슨 씨 인가? 

이 세상의 생물학적 씨가 아닌 것이다.

생물학적 씨는 이 세상에서 생식하지마는 저 천국의 씨는 생식하는 씨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복음서에서 분명하게 구분해서 예수께서 말해주셨다.

다시 말하면 이 씨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닌 것이다.

열매 맺는 씨는 이 세상의 생물학적 씨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씨 그 자체가 자라는 것이지 씨가 씨를 낳는 것이 아닌 것이다.

성경에서 30배, 60배, 100배라는 말은 잘못이다.

몇 배라는 말도 아니고 또 몇 개라는 말도 아닌 것이다.

그때 당시 퍼센트라는 말이 없어 표현 못한 것뿐인데 이 말은 30%, 60%, 100%를 의미한다.

적어도 씨가 30%이상 자라야 저 세계로 옮겨갈 수 있다는 말인 것이다.



오늘 여기에서 또 한가지 알아야 될 것은 나는 선한 목자인데 이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느니라 되어있다.

그러나 이 말도 적절히 번역되지를 않았다.

여기서 ‘프쉬케 (ψυχή )’라는 단어는 “영혼”,”목숨”,”생명”의 뜻을 가지나 본문에서는 영혼,정신으로 번역함이 적절하다.

그래서 다시 번역하면 ‘양들을 위해서 내 모든 정신을 바친다’로 볼 수 있다.

내 모든 영혼과 정신을 이 세상 양들을 위해서 집중한다 그 말인 것이다.



예수님은 나의 목자이시다.

이 예수님을 알기를 예수님이 아버지를 아는 정도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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