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0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0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0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0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0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0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0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0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
본문에서 예수를 가리켜서 ‘그는 하나님이다’ 라고 번역된 것은 독자들에게 오해를 줄 수 있다.
그는 神이다 그런 말이다.
그는 神格을 가졌다는 뜻이다.
또 하나님께로부터 보낸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요한이다.
원어에는 같은 神이라도 요한을 보냈다는 神의 의미가 다르다.
그런고로 한 神 즉 여호와 神이 보낸 사람이다 그 말이다.
여기서 말씀이라 번역한 것은 원어로는 로고스(logos)라는 말인데 이 말을 말씀이라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요사이 영어에서 사용하는 말을 보면 가령 Biology에서 logy가 로고스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이 로고스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한다면 하나의 원론, 이치라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
로고스를 말이란 뜻으로 번역하면 안된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은 태초에 원론, 이치가 있었다 그렇게 번역해야 한다.
그런고로 예수님이라는 분이 어떤 존재인가 하면 로고스라는 분으로 존재했다 그 말이다.
이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있었는데 이 로고스 자신이 하나의 神 이다 그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아니였었다 그런 말이다.
그런데 이 로고스라는 말은 희랍어인데 BC 6세기부터 희랍의 철학사상에서 가장중요한 말로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소위 기독교 학자들이 요한복음이 희랍사상을 본 따서 기록한 책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로고스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기 때문에 이 말로 표현한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BC6세기 경부터 오랫동안 학문적으로 주요한 진리를 표현하는데 널리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예수님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이 말이 적절하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이 말로 써 있는 것이다.
이말은 ’로기아’ 집합이란 말과 ‘로고우다이’ 계산이란 말 그리고 ‘로기코스 로 말한다 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말들이 희랍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 집합, 모은다는 것이 그저 모으는 것이 아니고 계산한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 말이 로고스의 원천적인 의미이다. 희랍철학에서는 이 말이 없으면 설명이 안 되도록 되어있다.
이 집합이란 말 가운데는 계산한다 즉 다시 말하면 이치가 수행되어 져야 한다.
따라서 이것을 설명하는데는 로기코스 즉 이론을 전개하는데 이 말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로고스라는 말이 철학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말이 주전 6세기경부터 희랍사상가들에 의해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령 예를 들면 희랍철학자들 가운데 주전 544~484년까지 살았던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로고스가 우주의 근본원천이다 말한 것이다.
우주의 근본이치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로고스로 설명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BC3~4세기경 스토이카 철학파도 로고스로 이 원천을 설명해 왔던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 (B.C 492~432), 아리스토텔레스 (B.C 384~322) 이런 철학자들도 로고스로 철학을 세워왔던 것이다.
플라톤 (B.C 429~347) 이 사람도 로고스를 가지고 우주의 원리를 설명해 온 것이다.
또 제노 (B.C 490~430)라는 철학자도 천지 우주의 원리를 로고스로 설명했다.
필로라는 유대인 철학자는 알렉산드리아에 알면서 B.C 15~10 사이에 많은 논문을 발표한 사람인데 유대의 종교사상과 희랍철학을 종합하는데, 연결시키는데 노력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로고스는 우주의 원칙을 설명하는데 여기서 처음 집합이란 말 "로기아"가 나와 가지고 그 다음에 "로고우다이" 이것이 모은다라는 것을 수학적인 계산으로 여기서 수학적인 이론, 원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집합을 설명한다 전개한다라는 의미에서 "로기코스"로서 이 세가지 말이 합쳐져서 로고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희랍철학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요즈음에 와서 고등학교까지 집합론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 집합론이 수학의 왕자이다.
이 집합론에서 Topology, Homology, 대수학등이 나왔고 과학의 기본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집합론에서 나왔다.
요사이 과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집합론에서 나온 학문인 것이다.
이상하게도 희랍의 logia집합론에서 모든 학문이 전개되어 나온 것이다.
오늘날도 집합론이 모든 과학의 핵심을 주관하고 있다.
종종 이야기된 것이지만 과학이 조금가면 끝이 온다는 것도 이 집합론적 결론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 집합이란 말 한마디가 우주의 근본을 해결하는 근본적 원소로 전개되어 온 것이다.
요한이 다른 복음서에서는 쓰지 못한 logos 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는 자체가 다른 복음서보다 뛰어나고 특별한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원어는 완벽하고 쉽게 되어있다.
예수께서 요한을 특별히 사랑했다 하는 것은 예수의 제자 가운데 오직 요한만이 예수님의 말씀 일부라도 깨달을 수 있었고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요한은 자기가 쓴 복음서의 첫 절에 바로 이 로고스라는 말을 쓴 것이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옆에 있었고 주요한 위치에 있는 분이였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로고스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으니 이 말 한마디로서 무식한 사람들은 모르지만 적어도 지식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요한이 요한복음 첫 절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이제 본문에서 보면 이 로고스라는 분은 하나님과 같이 있었고 예수님은 G.M(신격인 인간)으로 왔다 그 말인 것이다.
이제 또 중요한 것은 3절과 10절에 보면 모든 창조물이 그를 제외 하고는 되어진 일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주 만물이 지은바 되었느니라 그런 이야기 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로고스라는 말만 가지고도 설명되지만 그보다 더 설명을 추가한다면 이 세상에서 존재는 그 무엇도 그를 통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여호와는 창조주가 아니다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우주의 창조주이지 이스라엘 神 여호와는 창조주가 아니다라는 것을 여기서 암시해 주는 것이다.
오늘날 이와 같이 성경책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이 천년 동안 밝혀지지 못한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예수님을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다 말한 것이다.
따라서 그 본질을 설명하기를 그는 생명을 가졌고 또한 그는 빛을 가졌다는 것이다.
단 한 가지 여기에 없는 말이 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온 것에 대해 전혀 설명이 없다.
왜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는가 그것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은 모른다. 또 알 필요도 없다.
특수한 사람이나 알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세상 사람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왔다 말한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요한은 그때 바울이 떠들고 있는 말, 예수께서 이 세상의 인류의 죄를 위해 죄값으로 왔다는 말을 몰랐을 리가 없다.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어떤 목적으로 왔다 여기에 언급이 없는 것은 바울의 그 말 자체가 틀렸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여호와가 창조주가 아니다.
분명히 말해 주었고 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은 인간은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33년을 살았느니 하며 무슨 말들을 하지만 내가 늘 이야기한데로 예수께서 인간과 접촉한 것은 한 일년 반에서 2년 정도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냉정히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만약 인간을 위해 오셨다 하면 그는 이 세상을 위해서 적어도 몇십년 아니 몇백년을 살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을 위해 왔다 하는 사람이 어떻게 2년 정도 지내다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것이 어떻게 사람을 위해 왔다고 보는가? 아닌 것이다.
적어도 이 세상에 몇 백년을 살아야 하고 또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기록도 남겨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 다음에 곧 떠나갔다.
나는 예수께서 이 땅에 한 일년 반 정도 밖에 안 계셨다 하는 것을 발견하면서 예수님은 진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장 적은 일이지만 우리는 그 일단을 가지고 진리를 알 수 있으며 그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한 일년 반 정도 있다가신 그것이 ‘그가 진리이심을’ 표명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 여기서 예수님이 왜 왔느냐 한 것에 전혀 언급이 없다는 자체는 바울이 떠들고 돌아다니는 말들이 틀렸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 것이다.
다음에 무슨 기록이 있는가 하면 그를 믿는 자에게는 무엇이 되는가 하면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육정으로도 아니고 사람의 생각으로도 아닌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느니라 그런 이야기이다.
이것은 이전에 내가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인간이 구원 얻는 데는 M.G이다 그런 이야기이다.
이것이 오늘 요한이 예수님을 로고스라고 우리에게 천명해 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육정으로도 아니고 사람의 뜻으로도 아닌 신격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神으로서 사람으로 왔지마는 지상에서는 사람으로서 神格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인간도 새로운 사람으로 또는 새로운 존재로 성장되어야 함을 말해 준 것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사는가 바로 G(신격)를 성장시키기 위해 산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동물의 생활을 하기위해 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적은 이 G를 성장시키기 위해서이다.
산다 하는것 자체가 바로 육정으로도 아니고 사람의 생각으로도 아닌 새로운 인격의 조성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의 설명으로 로고스라는 말 한마디로 예수님이라 하는 분이 어떤 분 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요한은 거기에 부연해서 모든 창조물이 그를 통해서 되어왔고 또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여건으로서는 육정으로도 아니고 사람의 뜻으로도 아닌 새로운 인격의 조성으로 된다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왔는가 거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천국에서 가장 말단적인 존재이다.
그 말단적인 존재로서 진리의 표현과 진리의 규명과 하나님의 뜻의 완수를 치루는데 최종의 시험장이 바로 이 땅이었다 그런 이야기이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최종의 극단의 세계에 처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추측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온 목적에 대해 언급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은 여러가지로 추정할 수 있으나 정확히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몰라도 된다 하는 것이고 사도바울의 세상 사람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해 왔다 하는 설명은 틀렸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