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0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0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0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0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0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0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0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0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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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많은 사람들이 옷을 벗어 길에 깔거나 또한 나뭇가지를 꺾어 만세를 불렀다.
여기서 ‘호산나’는 “원컨데 구원하소서”의 문자적 의미가 있고 우리나라말로 만세라는 의미이다.
이때가 유월절 며칠 전이었는데 유월절은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희망하며 모이는 때이다.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 민족만큼 고난을 당한 민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6~7개국의 지배 하에 있어 보았다.
앗스르, 바벨론, 파사, 희랍, 로마 이와 같은 나라들에게 지배를 당하며 피지배 민족으로 고생을 했고 그래서 자연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 동양으로는 인도 부근까지 또 서쪽으로는 이태리,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에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각 국내 흩어져 살면서 그들 민족끼리는 뭉쳐서 같은 민족으로 살수 있게 되기도 하였지만 반대로 그 나라에는 동화되지 못하고 학대를 받거나 사이가 좋지 않게 지내왔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애굽에서 잘 살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여호와가 끌고 가나안 땅에 나왔지만 그들은 거기에서 정착해서 살수도 없었고 또한 그 고난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으며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 남의 지배를 받는 민족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민족신 즉 여호와 神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하고 그래서 각국 민족과 잘 섞이지 않은 그런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자연히 남들보다 좋지 않은 대우와 환경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언제나 여호와가 약속해준 이 복지의 왕국을 희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월절이 되면 멀리 살지라도 돈을 저축하고 저축하여 머나먼 이스라엘까지 왔던 것이다.
타국에 살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유월절 시작되기 2~3일전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게 됨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제 정말로 바라던 다윗과 같은 왕이 온다. 혹은 메시아가 온다. 이렇게 그들은 착각을 하고 그대로 믿고 자기의 웃옷을 벗어 길에 깔거나 종려나무를 꺾어 호산나 부르고 외쳤던 것이다.
그래서 이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스가랴 9:9절에 있는 예언이 응했다 한 것이다.
이제 평화의 왕이 온다고 떠든 것이다.
이 사건은 네 복음서에 다 기록이 되어 있는데 누가 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탄생할 때 하늘에는 영광이 있고 땅에는 평화가 있다고 다시 한번 탄생기록에 인용된 구절을 삽입해 넣은 것이다.
그런고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에 대해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군림했다 이렇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을 해 볼 때 예수님이 무슨 연극을 했겠는가 그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왕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지키는 왕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심지어는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고 여우도 제가 살수 있는 굴이 있지만 나는 이 땅 위에 머리 둘 곳이 없다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 아닌 사람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유대인들이 과거에 가지고 있는 예언의 시기를 타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섬에 들어간 까닭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본래 연극을 잘 하는 배우 같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다.
희랍어에 무슨 말이 있는가 하면 죄인 가운데 가장 나쁜 놈이란 말로 ‘히포크리테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배우라는 뜻이다.
예수께선 배우라 하는 저들을 부정적인 의미로 표현했다.
그런 예수께서 왕도 아니면서 나귀를 타고 마치 왕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듯 보여주었느냐 하는 이야기이다.
만일에 예수님이 그런 생각으로 하였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
그런 위선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그렇게 요란하게 입성하고 난 다음 이틀 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다.
그러면 이 사건이 오늘날 예수님 믿고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 이와 같은 일을 보여주었는가?
예수님은 마침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의 기회를 탔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고 다 자기나라의 회복을 기대하거나 바라던 사람들이 거리를 막론하고 먼 길을 온 것이다.
그래서 이번 유월절에는 무슨 일이 있을까? 기대를 가지고 왔던 사람들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왔을 때 예수님은 이 기회를 탔던 것이다.
성경에 어린 나귀를 탔다고 하며 이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란 예언에 맞추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이 나귀를 탄 것은 높은데 올라앉기 위한 이유에서였다.
높은데 오른다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보이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이 키가 컸는지 작았는지 알 수가 없다.
예수님의 화상이 남아있는 것이 네 종류인데 그 중 하나가 예수님이 골고다로 십자가로 끌고 갈 때 너무나 땀을 흘리니까 옆에 있던 여인이 손수건을 꺼내 주는데 예수님이 그것으로 얼굴을 닦으니까 하도 먼지가 많아 예수님의 얼굴 모양이 그 손수건에 찍혔고 그것을 그린 그림이 현재 바디칸에 보관중인 것이 그 하나이다.
그것을 보면 예수님은 요즈음 말로 말하면 잘생긴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또한 예수님은 특별히 컸을 것으로 보이지 않고 보통 사람 정도였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여러 사람에게 자기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귀에 올라앉았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먼 거리에서도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이 왜 온 세계에서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기를 보여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 행동에는 대단히 주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는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 관계 있는 사람들도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왔던 것이다.
왜냐하면 성전자체가 무슨 역할을 하는가 하면 성소 외에도 은행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거기서 장사도 하고 돈도 바꾸어 주고 하면서 이자도 받아들이고 했던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가 성전을 두드려 부시며 강도의 굴이니 장사꾼의 집이니 한 말이 그 말씀 그대로인 것이다.
성전이 거룩한 일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뜰에서는 소위 은행 일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고로 세계에서 장사하는 사업가들이 모여든 때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도 그곳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 신약성경을 이해하려 해도 그때의 세계의 역사를 모르면 제대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성경의 신약만이라도 제대로 알려면 적어도 BC 500년부터 시작해서 예수님 당시까지 주변나라 즉 인도에서부터 시작해서 유럽과 아프리카 등에 있는 주변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등 각 방면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이 성경의 기록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때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 사람은 물론이고 이스라엘에 관계 있는 사람들도 예루살렘으로 왔던 것이다.
이런 모처럼 있는 기회에 예수님은 나귀에 높이 올라앉아서 들어갈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다리는 평화의 왕이 입성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예수님은 평화의 왕은 아니지만 이때를 이용해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자기를 보이려 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나귀를 타고 입성한 이유는 첫째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그것이고 다음에 하나는 내적으로 승리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제 나는 승리했다 하신 것은 이 땅에서 그의 사명을 완수한 후 이 세상을 이기셨다는 뜻이다.
인생이라 하는 것도 이 땅에 와서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이 땅에서 승리한 인생을 보냈는가?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을 살았는가 그것이다.
우리들도 반성해야 될 것은 내가 사는 동안 승리의 인간으로서 일생을 보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실패한 인간으로 이 세상을 마칠 것인가? 이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이 땅 위에서 오래 살아도 패배의 인생을 산다면 하등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누구나 사람은 나날이 반성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나는 완전히 승리했다.
내 임무를 온전히 다 해내었다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높이 나귀에 올라앉아 승전장군이 오는 모습으로 나타나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런고로 나귀를 타고 입성한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나는 많은 사람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과 하나는 내적으로는 나는 승리자다. 이겼다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인간도 참된 인생은 이 세상의 부조리와 악과 싸워 이기는 것이다.
평안히 앉아서 살겠다 하는 것은 그것은 짐승의 생활이지 예수님의 인생과 같은 생활은 아니다.
예수님은 나는 이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 하는 것도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싸움을 가지고 왔다 전쟁을 가지고 왔다 그런 이야기이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전쟁의 하나의 사령관으로 이 세상에 군림했다 그것이다.
그 결과 이제 모든 것을 이겼으니, 승리했으니 승리할 때는 가만히 숨어들어 오는 것이 아니고 승전장군이 입성할 때와 같이 온 백성에게 알리는 그와 같은 행사를 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은 대단히 주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음에 예수님은 승리했다 하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지만 무엇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는가? 이다.
배우도 아닌데,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를 보여야 한다. 알려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인가?
이제 오늘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간 예수님은 이틀 뒤에는 가장 악한 죄인 취급을 받고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이다.
오늘 나귀를 타고 들어온 영광의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그 이틀 뒤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죄를 짓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이다.
이스라엘의 평화의 왕으로 온다고 해서 들떴던 사람들이 이틀 뒤에는 형편없는 모습으로 죄인 되어 죽는 모습을 또한 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볼 때에 이것은 하나의 비관이려니와 큰 의문이 되었던 것이다.
어제는 이 나라의 평화의 왕으로 군림하던 임금으로 온 사람이 오늘은 왜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리며 아무런 말도 못하고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가?
어제는 나귀에 올라앉아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아로 보이던 예수님은 오늘은 십자가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죄인의 모습으로 보이게 되었는가?
두 경우다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큰 모순과 함께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때에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도 역시 모순과 함께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이 모순 덩어리라는 것을 늘 보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큰 기회이다.
우리는 언제나 모순을 보면서 그것을 반성하면서 승리를 갖게 되고 또한 인간으로서 보람을 갖고 또 그 가치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이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에 있는 모순을 보고도 모순인줄 모르고 모순을 해결할 줄 모르는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어제 보던 저 영광스런 왕하고 오늘 지옥 같은 저 밑에 떨어져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의 모습에서 마음속에 큰 고민과 함께 모순을 느낀 것이다.
세계 각국에서 무엇인가 찾아보려고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은 큰 비관을 가졌고 모순을 가지며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 사건을 직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약 하루 반 만에 다시 사신 것이다.
이제 다시 사신 예수님을 같은 사람들이 또한 세계 각국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살아난 예수님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직시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다시 사신 예수님을 일시에 본 형제자매가 오백 명이 넘는다.
그 중에 대다수가 아직도 살아있다고 바울이 말한 것이다.
바울이 기록하기는 오백 명이다 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보게 된 것이다.
이제 평화의 왕으로 군림한 것도 예수님이란 그 사람이요 오늘 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도 그 사람이요 내일 다시 살아난 예수님을 본 것도 그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고로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가 부활한 이후로도 40일 이상 이 땅에 머물며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한 것이다.
이제 이렇게 됨으로서 지금까지 평화의 왕으로 왔던 사람이 십자가에 죽을 때 비관자로 있었지만 그가 다시 살아남으로 마음속에 비관과 모순과 의문이 해결되었던 것이다.
저기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다시 살았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아니라 영원한 존재로 다시 살아있다 하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고 그들의 인식가운데 확고한 철학이 생겼다 그런 이야기이다.
모든 의문이 해결되었던 예루살렘에 오랫동안 머물게 되었느니라. 그런 이야기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날 (일요일)에 예수께서 나타났으니까 그 다음 일요일 날 또 올 수 있다. 또 그 다음 일요일 날 볼 수 있지 않은가 예수께서 이 사람들에게 보인 것은 늘 이었다.
그래서 일시에 오백 명 앞에도 나타나게 되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되어 이 일요일날이 예수님을 만나는 날로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주일예배를 보는 것이 그 때문에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주요한 안식일을 내버려두고 일요일을 지키게 된 데는 그와 같은 주요한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일요일 날 모여 노래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교회가 생기게 된 것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하루에 삼천명이 회개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 사람들이 모두 예루살렘에 살았던 사람이 아니다.
세계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이제 깨닫게 되고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고 여러 가지 증거가 많은 까닭에 그리고 그 증거가 확실한 까닭에 예루살렘에 교회가 정착되어서 오늘날 교회의 뿌리가 된 것이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온 것은 많은 사람들은 인도하게 하기 위함이요 교회의 기둥이 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날 것을 기다리며 예수님의 말을 상고하고 예수님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한 후 예수님을 만나보았던 사람들은 이제는 자기가 살던 지방으로 가게 되었고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곳곳에 교회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만일에 이렇게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보여주지 않았던들 오늘날 교회는 성립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12제자 베드로, 안드레, 바울 그런 존재들 가지고는 교회가 안 된다.
베드로처럼 당장에 선생님을 앞에 두고 부인한 그런 사람이 있어보아야 교회가 되느냐 그런 이야기이다.
이제 온 세계에서 온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교회가 성립된 것이다.
로마서에 보면 로마에 그렇게 큰 교회가 그것이 바울이나 베드로로 인해서 된 교회가 아니다.
로마에 가보면 베드로가 로마에 왔다는 전설이 있지만 베드로는 로마에 간 일이 없다.
예루살렘에 왔다간 그 많은 사람들이 로마에도 세계적인 큰 교회는 세운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온 세계에 교회가 생기고 예수님을 믿게 된 까닭이 그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갔던 그 일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뿌리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되어 교회가 형성된 것이다.
우리는 학문적으로 볼 때 교회는 예수님을 부활한 것을 직시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인식하는데 있어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예수님이 부활한 증거를 과학적으로 확실히 포착해야 한다.
그저 예수님이 부활했겠거니 하는 정도의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부활한 확실한 증거는 교회가 좋건 나쁘건 교회가 있는 것이다.
이 교회는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더라면 성립되지 않는다.
부활로 말미암아 오늘날 교회가 생겼고 다음에 부활을 인식하는 것은 예수님은 아직 살아계시니까 그와 대화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와 소통(communication)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일생동안 단 한번이라도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한 증거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또한 부활한 예수님의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