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교회
 
작성일 : 16-07-27 09:34
설교제목 : 예수님을 아는길
 설교일자 : 1989.11.05
 KEY WORD : @ 가버나움 세겔 세상 임금 관세 국세
 성경구절 : 마17:24~27
 관련구절 :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729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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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전세를 내지 않는다고 유대인들로부터 추궁을 받았다.

이때 베드로는 성전세를 내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나타났을 때 예수께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른 사건과 차이가 있다.



유대나라는 여러 가지 세금이 있지만 특별히 성전세라는 것이 있다.

이 성전세는 출애굽기 30:13절 이하에 보면 반 ‘세겔’씩 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출애굽기(30:13~15)

(인구 조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내야 한다. 한 세겔은 이십 게라이다. 이 반 세겔은 주에게 올리는 예물이다. 스무 살이 넘은 남자, 곧 인구 조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주에게 이 예물을 바쳐야 한다. 너희가 목숨 값으로 속전을 주에게 올리는 예물은 반 세겔이다. 부자라고 해서 이보다 더 많이 내거나,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이보다 덜 내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아주 엄격한 규정인 것이다.

누구든지 유대인들은 20세가 되면서부터 성전세를 내어야 하는 것이다.

세겔은 이스라엘 화폐이지만 본래는 바벨론 돈이다.

출애굽기에서 처음 기록될 때에는 애굽말로 ‘데카’라는 돈을 내도록 되어있었는데 후에 여러 번의 기록이 반복되면서 세겔로 고친 것이다.

세겔은 은전인데 이때는 돈의 가치를 중량으로 정했던 것이다.

세겔은 종류에 따라 무게가 다른데 어떤 세겔은 13.28g 정도이다.

그런데 성전에 내는 은전은 조금 무거운 종류이다. 14.6g 정도 된다.

성전에 내는 돈은 무거운 것으로 내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이 성전세는 유대인으로서는 절대적으로 바쳐야 하는 돈인 것이다.



오늘 설교제목이 예수님을 아는 길이라 했는데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큰 목표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神은 어떤 神이든 자기가 창조주라 한다.

예를 들면 이슬람교는 알라神이 창조주이고 하나님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神이 최고의 유일 신인 것이다.

또 바벨론은 말둑神 창조주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각 민족은 자기들의 민족신이 최고신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神이 창조주인지 인간은 분간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세상 지식도 죽도록 노력해도 모르는 것 투성인데 어떻게 인간이 이 神은 옳은 신이고 저 神은 옳지 않은 神인지 구분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온 세상 사람들은 제각기 편한대로 자기 神을 섬기고 있을 뿐인 것이다. 

아니 덮어놓고 믿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 神이나 믿고 있다가 자기 목숨이 끝나는 날 속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므로 예수님도 덮어놓고 믿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일에 예수님이 믿을 만한 존재가 못되고 또 형편없는 神의 아들이라면 그를 믿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인간으로 왔다. 인간으로 왔으므로 그의 말이 인간의 말이고 그의 행동이 인간의 행동을 보인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님을 어느정도 알 수 있는 능력이 구비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모르고 무조건 믿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첫째로 예수님을 알려고 하면 그의 고향( home country )이 어디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는 어느 곳에 살던 사람이었는가? 그의 본향은 어디였는가? 그것을 알아야 한다.

이 땅 위가 그의 본거지라면 예수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그렇게 숭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땅 위에서 난 인간은 물론 그 중에서 훌륭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계를 가지고 있다.

동양에서는 중국에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낳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 중에서도 공자를 제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다시 평가해 보자면 공자를 아무리 따라다녀보아도 내 생애에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자공이라는 공자의 제자가 공자에게 사람이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하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때 공자의 대답은 내가 사는 것도 모르는데 죽음다움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 대답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생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람을 아무리 쫓아 다녀보아야 나도 모르는 사람밖에 될 수 없는 것이다.



석가는 인간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이다.

나도 한때는 불교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불교의 극단은 불(拂)인데 이 말은 본래 산스크리트어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불을 한문으로 그대로 써버린 것이다.

불이란 말을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깨달음의 극치가 바로 인생은 허무하다는 것이다. 

무(無)다. 없다 하는 것이다.

없다 하는데 쫓아다녀서 무엇 하겠는가?

하기야 인생이란 종말에는 없어지는 것이다.

요전시간에도 말했듯이 인생은 마지막에는 다 죽는 것이다.

원어로 “네크로스”다 즉 사물(死物이 되는 것이다.)

인생은 죽는것이라는 것을 알아 보았자 내게 무슨 유익이 되느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 세상에 예수님의 본향이 어디인가를 아는 것은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아는 것이다.

예수님이 어디에서 왔느냐 정확하게 인식하고 분간하여야 한다.

그의 한말이 훌륭하다든지 그런 것은 그렇게 주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두번째는 그의 성격 (character)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의 특성이 무엇인가?

그가 이세상 인간이라면 도덕적인 심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를 따를 필요가 있었겠는가?

예수께서 이세상에 와서 철학적인 학문적인 이야기를 한 것은 단 한마디도 없다.

이세상의 문학가, 철학가, 종교가가 한말 같은 그런 이야기가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특징이, 성격이 무엇이었는가 알아야 된다.

예수님은 이세상 사람들이 세상일에 대하여 물어보면 할 수없이 대답하였으나 그가 하신 말씀의 핵심은 세상의 윤리, 정치, 경제 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님이란 분의 성격자체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잘못하면 속아넘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슈바이처 말대로 예수님이 정치운동을 하다 로마 군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면 우리가 그를 따를 수 있겠는가?



세 번째로 알아야 될 사항은 그가 한일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가 이 땅에서 큰 사업을 일으켰는가?

어떤 백성을 크게 움직였는가? 혹은 그렇지 않으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운동을 했는가? 무엇을 했는가 이다.

그가 이 세상에서 약간의 병자를 고쳤다고는 하지만 유대나라의 모든 병자를 고쳐주었는가?

그가 문둥병자와 소경을 고쳐주었는데 정말로 고쳐주었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지금도 어떤 사람은 심령술로 사람의 병을 고친다고 떠드는 판에 지금부터 2000년 전에 무엇을 했다 하는 것을 그대로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확실한 증명과 증거를 가져야지 어떻게 그것을 무조건 믿을 수 있는가? 

그런고로 우리는 그의 본향이 어디인가?

그의 성격은 어떠한가?

그는 이 땅에서 무엇을 했는가?

또한 그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무엇 때문에 왔으며 무엇 하러 왔는가?  이와 같은 것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것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오늘 본문에 나와있는 것이다.

다른 성경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아 빠져있으며 이 말씀은 오직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성전세를 걷는 사람이 베드로에게 너희 무리들은 왜 세금을 안내는가?

율법에 엄격히 바칠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여호와에게 내는 의무금인 성전세를 왜 안바쳤는가 질문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은 그 동안 성전세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성전세를 바치고 안 바치고 에 관심이 없었고, 로마나라가 이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는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으며 이세상 사람이 잘 살고 못사는 것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길가던 중 소경이 예수님에게 소리지르고 애원하고 못살게 굴면 그때는 고쳐주었으나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소경을 고쳐주기 위해 방방곡곡을 찾아 다니며 고쳐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여기서 보면 베드로라는 인간이 경솔하게 성전세를 바치겠다고 말한 것이다.

성전세를 안 바치겠다고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였으나 그러나 대답을 해 놓고는 아무런 조처를 취할 수 없는 상황 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베드로를 보고 이야기 한 것이다.

이 세상 임금이 세금을 받을 때에 자기 아들들에게서 받느냐고 질문한 것이다.

‘아들’은 원어로 “휘오스”인데 넓은 의미로 “자손,자녀 및 가족이란 뜻이 있다 . 

본문에서는 ‘자녀 혹은 가족의 뜻으로 쓰였다. 

이세상 임금이 자기 자녀혹은 가족에게서 세금을 받는가? 이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다는 대답을 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렇다면 성전세가 필요 없지 않느냐 하신 것이다. 낼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구약 신명기 32:6절, 이사야 63:16절, 64:8절, 시편149편2절, 이사야 43:15절에 보면 나는 너희 아버지이며 여호와는 이스라엘백성의 아버지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백성은 다 내 아들들이다. 그런 뜻인 것이다.

또한 사무엘상 12:12절, 시편10편16절,44편4절, 에보면 나는 이스라엘이 왕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고로 여호와는 이스라엘백성의 아버지인 동시에 왕인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왕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의 왕이고 아버지인데 그의 아들들인 이스라엘사람들보고 무슨 성전세를 내라고 하는가 하고 베드로에게 힐책성 답을 하신 것이다.



신명기32:6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이사야63: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이사야64: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시편149:2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



이사야43: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무엘상12:12

(너희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너희를 치러 옴을 보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



시편10:16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시편44:4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야곱의 구원을 명하소서)



이제 예수님은 절대로 이와 같은 성전세를 낼 생각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내겠다고 대답을 했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갈릴리 바닷가에 나가서 낚시를 해서 올라온 고기의 입을 열면 한 세겔이 나올테니 그것을 너와 나의 세금으로 내라고 하신 것이다.

오늘이 사건을 보면 예수가 관심도 없었고 생각도 못한 일을 베드로가 저지른 일이므로 수습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단순한 사건인 것이다.

가만히 보면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인 것이 대단히 큰 기적 같지만 그러나 이 일은 예수가 특별히 기도하거나 하나님께 이 일이 이루어지도록 부탁을 하였는지 또는 어떤 계획 하에서 된 일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사건을 전혀 이와 같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일어난 일인 것이다.

예수가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세를 바치는 것과 관련해서, 베드로가 베드로가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할 것 인지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돈을 바치겠다고 약속한 베드로를 보고 바닷가에서 낚시질해서 물고기 입 속에 있는 한 세겔을 내라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돈을 베드로가 건져 올리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물속에서 없어질 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돈으로 세금을 바치라 한 것은 내버린 돈, 없어진 돈을 주워다가 바치게 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이 세금을 바치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물 속에 있는 동전을 어떻게 알았을까이다.

어떻게 알았을까? 미리 생각했다거나 계시를 받았다거나 기도를 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은 전혀 생각치 않고 있었던 일인데 즉 우연한 일이었는데 어떻게 저 물속에 있는 고기 입 속에 은전이 있는 것을 알았을까?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인간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예수님이 다른 큰 기적은 계획하고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일만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일은 이 세상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인 것이고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세상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이 그의 본향이 아닌 것이다.

단지 그가 저 바깥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올 때에 인간으로 오는 통로를 택한 것이다.

인간으로 와야만 인간들과 접촉하고 말을 전달할 수 있으므로 인간의 통로를 선택한 것뿐이다.

이 사건은 어떤 환경 하에서 된 일이 아니다.

예수님 본연의 자세, 예수님 자체의 성격인 것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 하시길 너는 저 갈릴리 바다에서 낚시를 하면 고기 한 마리가 올라오는데 그 입속에 한 세겔 있을 것이다. 

그것을 꺼내어 네가 무책임하게 말하여 낸다고 한 돈을 바치라 한 것이다. 

이 간단한 사건을 볼 때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은 아니다.

단지 그가 이 세상에 올 때 인간의 통로를 통해서 오신 것뿐이다. 딴 세계에서 온 사람임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제 그의 하신 말씀 모든 것을 종합해서 다음에는 그의 본향이 어디인가 철저히 규명해야 하고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왔느냐, 저 세계에서 이 세계로 온 까닭이 무엇인가도 알아야 한다.

현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려 온 것으로 가르치고 있으나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이유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돌아가신 것은 2천년 전부터 계획을 세운 신의 죄상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너희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가 아니라 너희가 나의 뒤를 따르려거든 너희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하신 것이다.

이 말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라는 말은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의 뒤를 따르려거든 하는 말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먼저 그런 각오를 가지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한쪽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성령의 감동이 절대로 필요하고 또 다른 한쪽으로는 끊임없이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 세상 글로 기록된 성경은 극히 완전하지 못하다.

예수님을 완전히 깨닫는데 대단히 불완전한 기록인 것이다.

따라서 이 불완전한 기록 가운데 순수한 중추 되는 부분을 가려내어 이것을 종합적으로 구성(organize)하여 예수님을 깨닫는데 크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

단시일에 예수님을 깨달을 수 없다.

가만히 앉아서 이 세상 종교가들의 이야기나 들어서 더더욱 예수님을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성경이나 다른 참고서적을 본다 하는 것도 다 예수님을 깨닫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예수님을 앎으로 인해 그의 길을 알 수 있고 이제 그의 길을 우리가 걸어가면 그 다음 세계는 영생의 세계의 문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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