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03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04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05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06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07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08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09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10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2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3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4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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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렸을 때 동경에서 유학시절, 돈이 없고 힘들 때 일본 사람인 ‘구보다고다로’라는 사람이 저를 동정해서 자기 방에서 같이 지내도록 도움을 준 일이 있었다.
그때 저는 그 사람이 너무 고마워 내 나름대로 좋은 말을 해준다고 성경이야기를 그에게 해 주었다.
떡 다섯덩이로 오천 명을 먹인 사실을 그 사람에게 이야기했더니 그 사람의 말이 거짓말이다 라고 한 것이다.
그 사람이 말한대로 옮겨보면 떡 다섯덩이로 오 천명 먹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거짓말이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저는 한마디도 대답을 못한 것이다.
그 성경말씀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만한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여러분 지금 어떤 사람이 이 성경말씀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아니다라고 증명할 능력이 있는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떡 다섯덩이로 오 천명이나 먹였다 하는 사실을 확증할 만한 마음에 준비가 되어있는가?
아니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으로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지 자문해 보기 바란다.
만약 단순하게 예수님의 말씀이므로 믿어야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옳지 못한 태도이다.
사실이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옛날에는 이와 같은 증명되지 않은 말들이 예사로 돌아다녔던 것이다.
아니 지금도 이와 비슷한 말들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신학자요 철학자며 의사인 ‘슈바이처’도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믿지 않았던 것이다.
기독교안에서도 주로 감리교 계통이 그리고 미국에서도 NCC계통의 목사들은 이 말을 사실이라고 생각하며 믿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라는 유명한 신학자요 과학자인 그는 많은 저서를 남긴 특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수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저도 그 사람의 책을 대부분 읽어 보았다.
그 사람의 책에서 보면 오늘 읽은 이 예수님의 기적을 증명하는데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이다.
성경에서 이 사건을 기록하는데 잔디가 많다 라는 말이 적혀 있는 것을 볼 때 이 같은 역사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인상이 그렇게 깊었기 때문에 이 말이 서로 관련이 없는데도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이라고 말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 오 천명을 먹였다고 했는데 여기서 오 천명이라는 말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유대나라 산술법에 사람을 떼를 지어 나누는데 군대식으로 나눈다.
한 부대, 두 부대 이렇게 나누는데 부대 단위가 천이라는 숫자와 같은 뜻으로 쓰인 것이다.
보통 한부대는 50명단위이기 때문에 다섯부대는 250명정도인 것이다. 원어로 오천 명은 ‘펜타키스킬리오이 ( πεντακισχίλιοι )'로서 그 뜻은 오천 명이 아니라 ‘오천’(five thousand)이다 .
따라서 오 천명은 다섯 무리에 해당되며 다섯 무리로 나누어 앉게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또한 마가복음 6장 40절에 보면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이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오 천명은 아닌 것이다.
예수께서 떡 다섯덩이로 오 천명을 먹인 것은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배가 고프고 불쌍하다고 생각 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왜 이와 같은 일을 하였는가 하면 예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위해서 한 일인 것이다.
떡 다섯덩이로 오 천명을 먹인 사건이외에 예수님이 보여준 다른 기적 같은 일들은 자기가 말로만 한 것이 아니고 실증을 보여준 것이다.
세상 인간들은 말로나 글로써는 그럴듯하지만 그 사람들의 실제 생활은 도적과 강도 같은 생각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 위에 와서 말로만 그럴듯한 말씀을 했다고 하면 그것만 가지고는 예수님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자기를 이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행동으로 보이신 것이다.
이 요한복음의 끝에 보면 예수께서는 엄청난 많은 일을 하셨지만 이 복음서에는 극히 소수밖에 기록하지 못했다고 요한이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으로도 가르쳤지만 자기의 실질적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실증을 보여준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이세상의 혈통으로부터 태어나신 사람이 아니고 저 타계에서 이세상에 온 것이다 그것을 보여준 것이다.
천지창조 이래로 이 지구상에 특별한 존재가 우리에게 나타났고 우리 인류사회에 와준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인 것이다.
다른 인간들은 모두 다 생물학적 방법에 의해서 이 땅 위에서 난 존재들인 것이다.
예수님은 타계에서 이 세상에 온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왜 오셨는가 하는데 있어서는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목적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을 인간은 직접 알 수는 없다.
내가 이전에도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특별한 방법이 우리들에게 계시되어 있기 전에는 인간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예수님은 이세상에 와서 특별한 방법으로 가르침을 주신 것은 물론이고 특이한 방법으로 자기를 나타내준 것이다.
자기를 나타낸다 하는 것은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아버지 되는 神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친 말씀을 가지고서는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데 도움이 되겠지마는 그것만 가지고서는 자기를 완전히 알릴 수 없고 하나님을 인식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와서 한 일년반에서 이 년정도 밖에 공생을 하셨을까?
왜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을까?
자기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를 이해시킨다 하면 한 천년 정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말씀으로만 가지고는 자기를 완전히 이해 시킨다던지 알릴 수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말로 완전하게 가르칠수 있었다고 하면 붓을 들어 기록하지 않았겠는가?
복음서를 저 무식한 제자들의 손에서 기록하게 했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또 부활한 다음에도 그렇다.
부활한 다음 여러 사람에게 오랫동안 보여주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요한복음에서 그래도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있는데 4~5일 정도 부활한 다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세 복음서는 부활의 기록이 미미하다.
누가복음에 보면 부활 요한복음에서 그래도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있는데 4~5일 정도 부활한 다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세 복음서는 부활의 기록이 미미하다.
누가복음에 보면 부활 후 두 제자에게 먼저 나타나신 후 약 일주일정도 지난다음 많은 사람을 모아 그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같은 사람의 기록인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 후 40일간을 제자들과 같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고로 각 저자마다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서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
마태복음에 보면 부활기록이 별로 없다.
단지 예수님이 부활후에 갈릴리에 나타났는데 그 중에 의심한 자도 있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에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단지 ‘예수가 부활하였다.’ 라고만 기록 되어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말이나 글로써 자신을 전적으로 인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아신 것이다.
그런고로 그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또한 이 세상에서 오랫동안 말씀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인식시키기 위해 인간을 개조하거나 다시 만드는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할 수없이 자기를 나타내는 방법으로 떡 다섯덩이로 오 천명을 먹인 일 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기적 같은 일을 보여주신 것이다.
한쪽으로는 말로서 사람들을 가르쳤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떡 다섯덩이로 오 천명 먹인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이는 선지자중 한사람이다 할 정도 뿐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이스라엘 선지자중의 한 사람 정도로 취급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특별한 존재로 전혀 인식이 되지 못하고 유대나라의 흔해빠진 선지자의 한사람으로 밖에 취급되지 못한 것이다.
그런고로 전혀 예수님을 인식 못한 것이다
오늘 성경본문 아래로 계속해서 읽어보면 예수님을 유대나라의 임금으로 추대 하려는 생각을 가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예수님을 전혀 인식 못한 생각의 발로인 것이다.
예수님을 정치인의 한사람으로 보고 그를 로마의 정부로부터 억압받는 유대나라를 구해줄 왕으로 모시면 어떻겠는지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선지자 중의 한사람으로 보거나 유대나라를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켜줄 왕으로 보거나 예수님을 근본적으로 인식 못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왜 이렇게 예수님을 몰라보았던 것일까?
그것은 천성적으로 창조주를 알 수 없는 저 능력에다가 또 하나는 구약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구약성경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떡 다섯덩이로 오 천명을 먹였다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 일이 특별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면서 40년간 광야생활을 할 때 ‘만나’라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을 먹었다는 것이다.
여호와가 40년동안이나 만나라는 떡을 내려 보내 이스라엘 백성을 먹여 살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여기에서 떡 다섯덩이로 5천명을 먹인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 구약성경은 예수님을 아는데 큰 방해물이 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만나’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이름을 지은 말로 히브리말로 무슨 뜻인가 하면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무엇인가? 놀라는 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늘로부터 떡이 내려와 갑자기 놀래서 나온 감탄사인 것이다.
그전에 보지못한 이런 만나라는 떡을 여호와가 40년동안이나 우리 조상에게 주었는데 오늘 순간적으로 떡 다섯덩이로 오 천명 먹인 것은 거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비쳐진 것이다.
그렇지마는 조금 특별하게 보아 선지자 중 한 사람정도로 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사람들에게 인식을 줄려고 애를 썼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제대로 인식 못한 것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르고 있고 기독교 역시 구약에 집중되어 예수님을 알 수 없는 소경이 되고 말았다.
저 이스라엘의 기록이 예수님을 모르게 만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이스라엘 조상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준 떡이 아니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만나라 하는 것을 요즈음 과학자들의 이야기로 보면 나무에서 내려온 가루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 조상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을 먹었다고 자랑을 할 때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하기를 너희 조상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을 먹어본 일이 없다 하시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은 바로 ‘나’라고 천명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은 조금 전에 이야기했듯이 참 진리, 참이치를 알리기 위해서인 것이다.
종교인이라던가 혹은 감정의 인간이라던가 정서적인 인간들보다는 진리의 참다운 이성의 인간들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이성에 의존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믿음이나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감성에 지나지 않고 그런 것을 가지고는 이런 神 저런 神을 분간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늘 떡 다섯 덩이로 오천명을 먹여 주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그 일을 눈으로 보고 예수가 어떤 사람인가를 사고하고 생각하며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예수님은 말씀으로도 우리에게 자기를 가르쳤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온 이유 중에서 대단히 중대한 또 다른 원인 중 하나는 우리 속에 있는 씨를 키우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오시기전에는 인간 가운데 있는 씨가 움틀 수 없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비로서 우리 속에 있는 씨가 움틀 수 있게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하늘로부터 인간사회에 이어지는 하나의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 문이 열렸다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 속에 잠자고 있던 씨가 움트게 된 것이다.
이 씨가 움트면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씨의 생명은 이 지상에서 오래 있을 수 없다. 저 세계로 이전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육체의 생명이 끝나면 내 속에 있는 근본적인 원칙의 생명은 하루라도 빨리 저 세계로 옮겨지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온 이후로 우리 인간들에게 열려진 문인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