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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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복음을 전했던 곳은 오로지 유대 지역 뿐이었다.
또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복음을 전한 것이었다.
떡 다섯덩이로 많은 사람을 먹인 곳도 바로 갈릴리 지방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화있을진저 고라신과 뱃세다야 이 많은 일들을 두로와 시돈지방에서 행하였더라면 벌써 회개했을 것이다’라고 책망하고 있다.
이러한 책망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현대에도 교회를 사회단체나 협동단체로 생각되고 주일날 설교를 수양 삼아 듣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절대적인 진리를 탐구하거나 내 생명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거의 발견할 수가 없다.
그때 당시의 가버나움이나 베다니도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 능력의 일을 행하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보여준 것은 하나의 교육이다.
그와 같은 일을 보고 깨달으라 한 것이다.
사람들이 말로만 해서 깨닫지 못함으로 실제로 보여준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므로 예수께서 책망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기록 된 것을 덮어놓고 무조건 옳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언제나 그 기록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판단해 보아야 한다.
옳으면 옳다고 인식하고 그 말을 따라야 되겠지만 그르면 그르다고 그것을 배척해야 한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나 하면 가버나움이나 고라신, 베다니 등에서 능력의 일을 했는데도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을 차라리 두로와 시돈지방에서 행했더라면 심판 때에 더 견디기 쉬웠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 자신은 가버나움이나 고라신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것을 몰랐단 말인가?
그와 같은 능력의 일을 행한 사람이 몰랐다면 문제가 된다.
또 알았다면 왜 두로와 시돈지방에는 그와 같은 일을 수행하지 않았던 것일까?
깨닫지 못 한데서 고의로 그와 같은 기적을 행하고 깨달음이 많은 곳에 가지는 않았단 말인가? 의문이 생겨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천당 갈 사람을 찾는다면 당연히 두로, 시돈지방에 갔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이 한 말이나 행동 모두 무조건 옳다고 보는 시각을 지양하고 비판적인 눈으로 의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단 오늘 성경에 나온 지역만 아니라 하나님을 전하고 아버지를 알리면서도 바깥세상에는 전혀 나가지 않았다.
이스라엘 땅만 빙빙 돈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 옆 지방인 바빌론이나 앗시리아 지역, 또 가장 문화가 발달된 애굽 지역이나 로마 등에는 가지 않고 왜 이스라엘 땅을 돌면서 있었을까?
예수님께서 바깥세상에서 그와 같은 똑같은 기적을 행했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또 예수께서 이 땅에서 공중생활을 하는 것이 1년 반에서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만 전도를 하고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만 세상에 와 있었을까? 하는 것이 의문이다.
적어도 다른 사람과 달라서 하늘에서 온 사람이라면 천년 이상 오래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어야 할 것이 아닌가?
또한 예수님이 미련한 몇 사람을 제자로 모아 가르치면서 왜 자기 손수 기록해 놓지 못했을까?
무지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을 그때 당시 기록했어도 문제가 될 수 있을 터인데 예수님의 말을 기록한 것이 무려 그 말을 들은 지 몇 십년 후 아닌가?
그와 같은 기록이 제대로 될 리 있었겠는가?
그 정확성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말할 때 아람말로 했겠지만 기록은 희랍어로 되어있으며 그 기록이 후세에 계속 전달되면서 변화는 없었겠는가?
또한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에도 제대로 되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끝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한 말이 나온다.
‘너희는 온 세계의 백성들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면서 전도 하라고 했다.’ 이 기록이 예수님이 한 말씀이겠는가?
이것은 기독교가 형성된 후에 삽입된 것으로 추정할 수 밖에 없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자기자신도 유대 땅 밖을 나가지 않았고 열두 제자 역시 모두 유대인들이며 또 예수님이 그들에게 전도를 나가라고 파견할 때도 이스라엘 밖을 나가지 말라고 했다.
유대인들에게만 전하고 다른 데로는 가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어느 정도 예수님이 한 말에 대한 구분을 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는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그 본부가 이스라엘 왕국이다.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인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는 천국 백성이 될 주된 사람들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12,000명씩 총 14만 4000명이고 그 변두리에 다른 나라 사람들로 채워진다고 하고 있다.
과연 예수님이 한 말씀이 이 점에 귀결되는가?
이스라엘밖에 나가지 않고 유대인에게만 전도한 것이 요한계시록을 확실하게 더 증명해주는 것인가?
그러나 그렇지를 못하다.
예수께서 말씀한 전체를 살펴본다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스라엘 나라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이스라엘 민족신이 구약성경에서 자기가 한 명령은 일점일획도 남김없이 다 이루어진다고 했듯이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나라)의 목적이다.
이스라엘 나라가 왜 생겼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조치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온다는 소식은 BC 2000년경 아브라함 시대이다.
이스라엘 민족신 여호와는 예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온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 神의 목적은 예수님을 자기부하로 만들던지 아니면 죽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명백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았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을 누가 시험했겠는가? 성경에는 사탄에게 시험 받았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
이 세상 다른 어떤 神도 예수님을 시험할 수가 없었다.
또한 예수님이 시험 받을 이유도 없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test할 神은 하나 밖에 없다. 구약을 읽어보면 확연히 들어난다.
또한 이스라엘신은 어떤 신인가? 물론 기독교에서는 여러 가지로 이야기 되고 있다.
그러나 구약에는 정확하게 신의 정의가 바로 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꼭 한군데 정확하게 자기의 성격을 설명한 곳이 있다.
바로 십계명이다.
이스라엘 신이 직접 썼다고 하는 십계명에 나는 질투하는 신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질투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것은 자기보다 우월한 자에 대해서만 형성된다.
자기보다 열등한 자에게서는 질투가 생기지 않는다.
이런 질투하는 신을 하나님으로 믿는 종교가 과연 올바른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자기보다 나은자는 누구인 것인가?
이것은 태양빛을 보는 것과 같이 확연히 알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인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이 왜 예수님이 이스라엘에만 있었고 다른 곳은 가지 않았으며 또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갔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유이다.
다시 말하면 지난번 설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세례요한은 여인이 출산한자 중 가장 훌륭한 자다.
이 말 중에서 여인이 출산한 사람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잘 알고 있다.
여인이 출산한자 중에 메시아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여인이 출산한자란 말은 인간이란 것이다.
모든 사람은 여자를 통하여 이 세상에 출생하지 않는가?
자연인은 모두 여자로부터 출생하는데 예수님의 이 말을 다시 들어본다면 자연인은 영생의 세계에 못 간다는 말이다.
여인이 나은자 중 가장 훌륭한 세례요한도 천국 못 간다면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절대로 자연인, 여자에게서 출생한자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예수께서 단언해주셨다.
자연인, 인간은 시간이 오면 모두 종말을 맞게 된다.
그렇다면 왜 인간을 이 세상에 두었는가.
그 목적이 무엇인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을 하나의 터전으로 field로 만든 것이다.
이 터전에서 천국에 갈 씨를 배양하기 위함이다.
씨는 자손을 의미한다.
저 나라의 백성을 이 세상에서 길러내기 위한 것이다.
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저 세상의 건설자인 것이다.
그 나라 백성을 예수께서 이 세상 인간들에게 씨를 뿌려서 길러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자연인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씨를 키울 수 있는 터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께서 이세상에서 오래 있을 수 없었던 것은 저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야 되기 때문이었다.
계획을 세운다는 것의 첫째로는 양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시간의 문제이다.
이와 같은 일 때문에 왜 이스라엘에만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가 밝혀지게 된다.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서 씨가 자랄 수 없는 최악의 조건을 가진 나라이다.
이스라엘인 중에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극히 제한 될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많은 민족 중 영생의 세계에 들어갈 사람이 최저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스라엘에만 있었던 것은 천국에 들어갈 최저의 수치를 측량하기 위해서 였다.
이스라엘의 최저 수만 확정되면 다른 곳은 그보다 위이므로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저 영생의 세계를 건설하는 데 하루 바삐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년 반 정도 있었던 것만 해도 크게 양보한 것이고 오래 기다린 것이다.
그는 단지 시험적으로 이스라엘에 와서 씨를 뿌린 것으로 그 결과를 보고 정리해서 모든 계획을 세우는데 필요하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저 영생의 세계를 만들고 설계하고 모든 것을 지도하고 하는 것이 예수님이다.
또한 이 땅의 인간들에게 영생의 씨앗을 뿌려주고 영생의 젖을 공급하여 먹여 살리시는 이도 예수님이다.
다른 신은 관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생의 문제는 예수님이 주는 하나님의 씨를 받아서 이것을 길러 내는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 씨를 키워 내는 데는 소질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으로부터 피와 살을 받아서 내속에 뿌려져 있는 씨를 키워야 한다. 자라게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소질을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인데 내가 그 소질을 가졌는가를 알아 보는것은 무척 힘들다.
지식자랑, 종교자랑, 학문자랑, 돈자랑 등으로는 씨를 키울 수 없다. 그런 사람은 희망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본아를 키울 소질이 있는가 없는가는 참것을 찾는 정신, 마음 등이 필요한 것이다.
참이 무엇인가를 찾는 추구하는 정신이 있는가가 문제이다.
다음으로는 바른 것을 찾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또 한가지로는 순서를 알아야 한다.
질서를 지킬 수 있는 order를 알 수 있는 노력을 하는 것 등이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하나님을 아는 데는 먼저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질서요 순서이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예수님 뿐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