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0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0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0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0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0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0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0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0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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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을 한 여인을 현장에서 붙들어 예수 앞에 데리고 와서 이 여자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질문하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자기들의 법에 따라 처벌하여도 되겠지만 일부러 예수님 앞에 이 여자를 끌고 나와 처벌하려 하는 것은 이스라엘 법을 내세워서 음행한 여자를 철저히 벌을 준다는 것을 예수님 앞에서 연출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며 또 다른 면에서는 예수님을 멸시하는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율법의 권위자라 하면 서기관이다.
이것은 서기관이라는 원어의 의미가 성격학자라는 말이다.
이 사람들은 구약성경에 대하여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바리새 교인이다.
이 단체는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종교 교파인 것이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듣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고 상대하기가 싫어서 머리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땅에 글 쓰는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글을 쓴 것은 아니지만 그 연출을 보기 싫어서 안보시려고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율법에는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면 여자는 무조건 여러 사람 앞에서 돌로 맞아 죽게 되어 있다.
원래 이스라엘 율법은 여자는 남자와 동등의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남자의 종이나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남자가 자기 부인과 살다가 살기 싫으면 종이 한 장에 서명을 하여 내보내면 이혼이 성립되고 여자는 어디에도 항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었다 하는 것 자체도 여자를 남자의 부속품으로 보는 상징적인 이야기이다.
그런고로 남자는 오늘과 같이 음행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대중 앞에서 돌로 맞거나 하지 않는다.
이 이스라엘 율법은 인간의 법이 아니다.
여호와 神(신)의 법인 것이다.
여호와 神이 직접 명령한 것을 모세가 받아써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해준 것뿐이다.
심지어 십계명은 여호와가 절대로 변경할 수 없다는 뜻으로 돌판에 새겨 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 보라는 이것은 여호와가 직접 만든 법 때문에 이 법을 앎으로써 여호와를 인식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한 것이다.
이 법에 여자가 음행죄를 범하면 그를 대중 앞에서 돌로 쳐 죽이게 되어있다.
돌을 들어 던질 때 두사람의 증인이 먼저 돌을 던지면 나머지 거기에 참여한 대중이 돌을 던저 여자를 죽이게 되어있다.
이것이 신명기 17:6~7에 나온다.
신명기17:6~7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거기에 보면 두세 증인이 먼저 돌을 들어 치게 되어있다.
이러한 행위를 자기들끼리 하여도 되는데 예수님 앞에 데려와 보인 것은 자신들의 율법이 굉장히 엄한 것임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농락하고 시험하려고 한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에 대하여 관련하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고 귀찮아서 모르는 척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 질문하므로 예수께서 일어서서 대답하기를 너희들 가운데 죄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 한 것이다.
그리고는 또 예수님이 앉아서 못 보는 척하고 머리를 숙여 땅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척 하신 것이다.
이때 돌을 들어 던지려 했던 기세 등등한 증인행세를 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피해버린 것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은 그 증인이 돌을 던지면 나도 던져야겠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증인들이 피해 달아나 버렸기 때문에 자기들도 하나씩 다 자리를 피해버린 것이다.
나중에 여자와 예수님만 남게 된 것이다.
오늘 예수님 앞에 나타난 인간들, 특별히 여인을 행해 돌을 던질 수 있는 증인 행세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유대나라에서는 존경도 받고 다른 사람들이 우러러 보면서 자기를 과시 할 수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한사람 두사람 돌을 놓고 피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앞에서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없었다.
왜 돌을 던질만한 힘과 권위가 없었을까?
이 사람들은 여호와의 법을 집행하기에 앞서 예수님이라 하는 인간을 한번 멸시도 해보고 그에게 도전을 해보고 하는 의미에서 예수님 앞에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슨 욕을 한 것도 아니고 야단 친 것도 아니다.
또한 법을 집행하는 것을 말린 것도 아니다.
너희 법대로 집행하려거든 하여라 한 것이다.
문제는 하나의 조건을 단 것이다.
단 죄 없는 사람 특별히 너희 가운데 음행죄가 없는 인간이 먼저 치라고한 것이다.
예수님이 책망한 것도 아니고 돌을 던지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다.
던질 수 있거든 던지라 한 것이다.
그러나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지라 한 것이다.
음행한 자를 돌로 쳐죽일 정도 되려면 너희 자체는 그런 죄가 없어야 될 것이 아니냐 마찬가지로 죄 있는 인간이 누구를 돌로 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죄없는 자가 먼저 치라 말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 둘 도망가고 그 곳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그 자리를 피해 버린 것이다.
왜 달아 났을까?
양심의 가책을 받은 것이다.
처음 돌로 쳐 죽일려 할 적에는 그들이 가진 양심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이 양심에 비쳐줄 빛이 없으면 즉 암흑 속에서는 양심이 작동을 못하는 것이다.
양심이 활동을 못하는 것이다.
양심에는 빛이 비쳐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거지와 같은 남루한 의복을 걸치고 겉 외양은 형편없었을 예수님 앞에서 이 사람들이 달아나게 된 까닭은 바로 예수님의 빛 때문이다.
예수님의 능력있는 빛 때문에 저들이 양심을 바로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내려와 있을 때는 조그마한 보잘것없는 인간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확고한 빛이었다.
이 세상 인간들은 빛을 비출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한 들 양심의 작동을 일으킬 수 없지마는 예수님은 진리의 빛이요 생명의 빛인 까닭에 예수님 앞에서는 그 양심이 가리워지지를 못하는 것이다.
빛이 비쳐지는 고로 나쁜 양심은 나쁜 양심대로 드러나고 도적의 양심은 도적의 양심으로 드러나며 올바른 양심은 올바른 양심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 자신에 대해 선언하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다.
물론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천명할 때 몇가지 말이 있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진리이다. 나는 길이다.
그렇지만 오늘 여기에서 나타난 사건은 예수님의 빛이 비쳐진 것이다.
이스라엘 법, 여호와 神의 손으로 만들어진 법이지만 오늘 이 장소에서 마음속에 빛을 비쳐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없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끌고 와서 예수님 앞에서 돌러 쳐죽이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예수님을 섣불리 알고 그를 농락하고 책망해 보려고 고소할 죄목을 얻고자 나왔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율법에 의지한 권위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온 그들은 예수님의 빛과 권위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천연적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숨길 수 없는 빛을 마음속에 비침을 받고 양심이 노출된 것이다.
요즘 말로 말하면 고주파의 전파를 맞은 그들의 양심은 죄가 있다는 것을 비로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고로 한사람 두 사람 피해 달아나게 된 것이다.
이제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빛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나라의 많은 종교 그러나 그 종교 단체들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인간의 마음속을 뚫은 빛이 필요한 것뿐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오지 않는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 역사와 의무가 대단히 바쁘고 중대했던 모양이다.
이 땅 위에 불과 1년반에서 2년 정도밖에 있지 않다가 저 세상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빛을 받아서 반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생겨야 한다.
예수님도 열 두 제자를 보고 말하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 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한다”고 하셨다.
12제자 뿐 아니고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의 빛을 반사 할 수 있는 반사경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에 이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지금 예수님의 빛을 받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2천년동안 기독교 자체가 예수님의 빛을 종이로 막고 흙으로 막고 돌로 막으며 뒤에서 제멋대로 제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빛의 본체이시다.
그 자신이 생명의 빛의 원천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받아 반사할 수 있는 깨끗한 마음의 거울을 가져야 한다.
그 빛을 받아서 반사할 수 있는 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