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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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오늘 하신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이지만 일상의 평범한 말로 표현되어 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기 몇시간 전 일인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눈치를 주는 말을 했는데도 전혀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남겨두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면서 하신 대화이다.
유대나라 습관에 떡은 여러개가 아니다.
한 개를 가지고 떼어 나누는 것이다.
예수께서 떡을 떼어 주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 했고 다음에는 마시는 잔을 가지고 이것도 각자가 자기 앞에 잔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잔을 돌려가며 마시는 것이다.
이제 잔을 돌리면서 이것은 내 피다 한 것이다.
그러므로 먹는 떡은 ‘내 몸’이고 그리고 마시는 잔은 ‘내 피다’ 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보통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말이 아니고 이 세상 이치로서 이해되는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근본핵심이 이 말로 표현된 것이다.
그런고로 이 말을 간단히 깨닫는 것은 쉽지않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내 몸’, ‘내 피’를 먹는 음식으로 표현해 준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그것은 나를 소화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예수님을 소화해야만 내 생명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먹는 떡이나 마시는 음료도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는 음식 중에 하나이다.
요즈음 기독교에서 자주 금식을 한다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이것이 마치 하나의 자랑거리처럼 생각하고 있는 인간이 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은 창조주가 우리에게 만들어준 원칙이다.
다시 말하면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시는 것은 정상적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소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음식을 먹고 소화를 못하면 병에 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 병든 자가 먹는 떡이나 마시는 잔을 소화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병든 자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다.
즉 소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늘 하는 이야기지만 예수님을 소화해야 한다.
쉬운 말로 말하면 예수님을 이해해야 한다,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의 범위내에서 예수님을 확실히 인식하고 이해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리석게 기독교가 이천년 내려오면서 믿으란 말만 강조한 것이다.
오늘도 예수께서 여기에서 중대한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다.
이것이 내 몸이다. 이것이 내 피다. 몸과 피는 예수님 전체를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존재를 다시 말하면 눈에 보이는 예수님 전체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을 먹고 마시라 다시 말하면 나를 완전히 소화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예수님 온전히 내 속에 있는 생명의 요소화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살고 살아야 될 때에는 먹고 마시며 그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생명이 유지되려면 예수님을 완벽하게 소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소화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내 속에 생명의 원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생명도 그렇지마는 저 세계에 가서 영원히 사는 생명에도 예수님이라 하는 요소가 없이는 순간도 그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여러모로 표현하였다.
어떤 경우 나는 "문"이라고 하여 자기를 통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표현하였고 다른 곳에서는 “나는 목자다”, 또 나는 너희들이 걸어가는 길의 역할을 하는 “길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떡 과 마시는 잔을 “내 몸”과 “내 피로” 표현하셨다.
때로는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일을 요구하는 말로 같은 멍에를 메고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같이 일하는 자”로 표현하기도 했다.
오늘 이 말도 자기를 표현하는 자기를 알리는 중대한 말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을 예수님이 학문적으로, 다시 말하면 철학적으로 표현했다면 그 당시 무지한 사람들이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이고 또한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고로 오늘 여기에서 중대한 말씀을 간단히 어린 아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표현해 준 것이다.
이것이 내 몸이다 이것이 내 피다.
이 말은 나를 완전히 소화를 하고 깨달아야 됨과 동시에 내가 없이는 너희들의 생명이 유지되지 않는다 그 말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없이는 이 세상뿐 아니라 저 세계에 가는 동안에도 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생명의 요소 및 생명의 주원료가 예수님인데 우리들의 생명이 유지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쉽게 일상의 평범한말로 그들에게 말해주었지만 그 때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고 제자들에게는 앞뒤가 맞지 않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들렸던 것이다.
그러나 떡을 주며 이것은 내 몸이다 하니까 그런 정도는 기억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 중대한 말씀이 전해진 것이다.
이 말이 고귀한 철학적 수식어로 또 높은 수학적 원리의 말로 표현했더라면 오늘날 과연 제대로 전해졌었겠는가?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에서는 이 원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잘 믿으라고만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도 비슷하였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힘을 받아 대단한 활동을 했던 것이다.
이것이 기초가 되어 교회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깨달았는가 하면 그렇지 못했다.
예수께서 부활한 것을 자기들이 보았으니까 며칠만 있으면 다시 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소문이 초대교회에 퍼지게 되고 많은 사람이 그 소식을 듣고 앞다투어 자기들의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납한 것이다.
그것을 또 장려했던 것이다.
재산을 바친 사건 중 사도행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어떤 부부가 집을 팔아 베드로 앞에 가져와서 이것이 우리 집을 판 전부라 한 것이다.
베드로는 그 집값의 절반밖에 안되는 것을 짐작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것이 네 집 판 돈의 전부인가 물었고 그 사람은 그렇다고 대단한 것이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호통을 치며 이 ‘거짓말하는 자여’하고 대노하니 그 자가 죽었다는 것이다.
아마 하도 크게 소리를 치므로 그것도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졸도를 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튼, 죽은 것으로 보아 밖에 나가 매장하고 또 그 부인이 들어와서도 역시 거짓말하므로 큰 소리로 책망했더니 죽었다는 것이다.
이 성경책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부부가 거짓말을 함으로 죽였다는 느낌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집을 팔아 절반을 감추었다 해서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그 사람을 죽였다 하는 그와 같은 졸렬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교인들이었고 베드로 자체도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집을 팔아 절반을 가져왔을 때, 너는 집 판돈의 절반만 가지고 와서 왜 나를 속이려고 하느냐고 베드로가 책망을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소리를 벽력같이 질렀다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의 수제자인가?
오늘날 교회도 이런 베드로를 예수님의 수제자로 받들고 로마의 베드로 동상의 천국열쇠를 쥐고 있는 모습과 또 그 동상의 발가락이 많은 신도들이 만지고 입맞추어 떨어졌다면 이 세상 기독교인이 얼마나 유치한 가를 짐작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 세상 기독교인들 중의 일부 사람들의 예수님을 믿는 형태는 이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께서 왜 저렇게 무식한 자들을 제자로 택했는가 생각해본다.
소위 그 당시 학자라는 사람들을 제자로 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민족신에 충실한 자들인데 예수님의 말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 기록할 때에도 자기들의 생각과 사상을 가미해 완전히 조작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와 같은 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 순수하고 무식한 인간들을 제자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해 준 것이다.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근본적으로 심각한 말이다.
따라서 이해하는데 노력해야 한다.
조금전에도 이야기하였듯이 예수님을 철저하게 소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완벽하게 인식하는 데는 저 세계에 가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것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왔느냐 아니면 위에서 왔는가 알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이 세상 사람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이 세상에 왔다면 더 오래있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어야 할 텐데 그는 왜 한 일년반에서 2년 정도의 짧은 삶을 살았을까?
또 예수님이 죽지 않으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애굽으로 도망갔다면 하루 반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에 피하려고 치면 피할 수 있었고 그 당시 갈릴리는 빌라도의 통치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왜 일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가?
여러 가지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예수님은 스스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을 재촉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하나하나 밝혀야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떡을 떼며 또 잔을 나누며 하는 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하며 그 깊은 뜻을 깨달아야만 한다.
무턱대고 믿는 것이 아니고 완벽하게 소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의지할 사람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