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교회
 
작성일 : 16-08-23 08:11
설교제목 : 예수님의 모습
 설교일자 : 1987.02.08
 KEY WORD : @ 영화 영생 만민 권세 창세
 성경구절 : 요17:01~05
 관련구절 :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284  


0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0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0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0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0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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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간단한 말이지만 대단히 심각한 말이다.
또 지금까지 성경에 이 말씀의 뜻이 왜곡되어 기록된 곳이 있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왜곡되고 사실이 아닌 표현이 있게 마련이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다른 종교 뿐만 아니라 특히 기독교의 성경은 기록자에 의해 첨부되고, 복사되는 과정에서  왜곡된 곳이 많다.



이제 우리들의 신앙생활이란 첫째로 이 거짓말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거짓말 세계에 있으면 일시적으로 내 심리가 평안하다.
노력을 안 해도 천당에 갈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마는 그러나 인생은 한도가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태어나면 다음의 운명은 죽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특징이다.
죽는 생각을 못하는 것이 인간의 결점이다.
여기 앉아있는 여러분도 반성해보아야 한다.
언제 내가 죽는다고 심각하게 반성해본 적이 있는가?
대개는 없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죽음이란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 사람은 경솔하게 행동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일도 즐거워하지 않는다.
또 비관도 안 한다.



오늘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얼마 전의 일이다.
제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자기가 가르쳐야 할 말씀을 전한 뒤에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하나님께 고한 최종의 기도이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한 마지막 기도이다.
그런고로 이 기도의 말씀은 결정적인 것이다.
때가 곧 올 것이다 했는데 그 때가 무슨 때인가 하면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이다.
내가 십자가에 달릴 때가 곧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그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를 영광스럽게 해 주옵소서’ 한 것이다.
몇 시간 후면 십자가에 달릴 분이 십자가에 달리는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또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내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린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독생자 예수님도 동시에 영화롭게 되는 시간이다’ 란 뜻이다.
여러분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나 보통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말이다.
이제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 인간의 입장으로 보면 가장 비통 스러운 일인데 이것이 하나님아버지께 가장 영광이요 그 아들인 내에게도 가장 영광스런 때란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정확하게 마음속에 깨달을 수 있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그 자체가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께도 영광된 시간이요 내게도 영광스런 시간이 되고 영광스런 사실이 된다 그런 이야기이다.
이 내용이 기독교 역사에서 제대로 그 뜻을 깨닫고 가르쳐진 적이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건은 가장 절망적이고 비관스런 일로 이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예수께서는 분명히 제자들이 듣는 마당에서 영광스럽다 말한 것이다.
그런고로 성경의 다른 곳에 무슨 소리가 있던지 간에 오늘 예수님이 공포하고 표현하고 약속한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바로잡아 나가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사건은 온 우주전체에 있어서 가장 정점(climax)의 시간으로 전에도 없었고 금후로도 다시 있을 수 없는 가장 중대한 시간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사건은 우리 사람들이 보기에는 손바닥 발바닥에 못이 박히며 비통스런 시간이고 멸시를 당하는 순간이요 무능한자의 일처럼 보여 불쌍 하게 볼 수 있고 이 세상 神의 승리라고 생각 될 수 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神의 역할이다.
기독교에서 만들어낸 사도신경에 보면 빌라도에 고난을 받고 죽었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 아니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다.
빌라도는 오히려 예수님을 살리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또 이스라엘 사람으로 예수님을 죽일만한 인간은 없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배고픈 자를 먹여주었고 앞을 못 보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었고 문둥병에 걸린 사람의 병을 고쳐주고 여러 가지 인간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해주었다.
인간으로서는 예수님을 죽일 사람이 없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죽인 것은 神, 이스라엘 민족神 밖에 없다.



그 神은 십계명에서 표명하기를 나는 질투하는 神이다 말한 것처럼 예수님에 대한 질투로 그를 죽인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죽이기만 하면 끝나는 것으로 알았지만 그 자체는 실패한 것이다.
단순하게 보면 예수님을 죽인 신의 승리라고 보여 지지만 오늘 예수께서 말씀한대로 그 때가 오면 즉 십자가에 달리는 그 때가, 그 시간이 아버지와 나에게 가장 영광스런 시간이 된다 한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마음속에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마태복음 27장 46절과 마가/누가 복음 등에는 오늘 이 말씀과 반대되는 기록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런 말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을 번역하면 ‘오 나의 신 나의 신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해석된다.
이것은 인간사회에서나 하늘나라에 있어서나 가장 비관스러운 이야기이다.



마태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신, 나의 신,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Eli,Eli,lema sabachthani?”의 기록에서. ‘사박다니’는 아람어로서 ‘쉬바크’에서 유래 했으며 ‘셰박타니’의 음역이며 이 단어의 뜻은 ‘당신이 나를 버렸다’의 뜻이다’. ’나의 신에서 ‘신’을  마태 복음에서는 ‘엘리’로 표현 했고 ‘엘리’는 히브리어 ‘엘리’의 역어이며 마가 15장 34절에 표현된 ‘엘로이’는 ‘아람어’로서 그 뜻은 동일하다.
‘레마’는 아람어로서 ‘왜’란 의문사이며 ‘라마’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 히브리 의문사 ‘람마에 대한 역어이다.
이 구절은 시편 22편1절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다윗이 여호와에게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하며 기록된 다윗의 시이다.
여기서 ‘버리셨나이까’의 히브리 단어는 ‘아자브 עָזַב '로서 ‘떠나다, 버리다’의 뜻이 있다.
마태는 예수께서 시편에 있는 다윗의 외침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시편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만일에 예수께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하면 요한복음과 공관 복음 관련 구절들과는 정 반대되는 내용이 된다.
또한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버린다고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겠는가?
만일에 공관 복음의 기록이 사실이면 우리는 그러한 예수님은 따를 수가 없는 것이 된다
이 구절이 기록되는 과정에서 저자 혹은 필사자에 의해 예수님이 다윗의 시를 인용한 것처럼 첨부한 것으로 추정 될 수 밖에 없다.
오늘 본문의 예수의 말씀으로 분명한 예수님의 태도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제 앞으로 닥칠 몇시간 후의 일에 대해서 영광된 시간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이렇게 버리십니까’? 이렇게 절망의 소리를 했다고 하면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따라서 무엇 하겠는가?
그와 같은 유약하고 의연치 못한 말을 예수님이 말씀했다고 하면 그를 따르는 것 또한 헛수고일 것이다.



인생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출생이요 둘째는 생활이고 셋째는 사망이다.
사람은 출생이 제대로 되어야 한다.
이세상 사람들은 출생이 잘못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출생보다 우리들의 이세상 생활이 또한 중요하다.
우리가 사는 몇 십년의 생활을 헛되지 않고 올바른 길을 가는 생활을 해야 된다.
물론 출생과 생활이 제대로 되어있다 하더라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지막 총결산인 사망인 것이다.
죽음이 그 사람의 인격이나 모든 것을 결산하는 법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우리의 선조 중 안중근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할빈 역에서 이등방문을 죽이고 사형집행이 있기 전까지 여순 검옥에서 6개월간 있었다.
여순감옥에 있을 때 그 감옥의 책임자가 문을 열어 사람들에게 글을 써주도록 허락도 했던 것이다.
안중근을 지키던 감옥의 일본인 사람은 나중에 안중근을 자기집 신으로 모신다.
이것은 6개월간 그의 모습을 본 일본사람이 자기원수로 생각해야할 사람을 신격으로 보고 자기집 신 즉 대대로 지금까지 그 자손들까지 안중근을 神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6개월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의 인격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신격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마지막 죽음이 대단히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예수가 오늘 아침에 말한 것도 그것이다.
이제 때가 올 텐데 이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를 말한다.
이 때가 내게나 아버지께 가장 영광된 일이고 영광된 시간이 되게 해 주옵소서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오늘 이야기한대로 예수께도 영광된 시간이요 아버지께도 영광된 시간이다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 다음에 하신 말씀은 영생에 관한 말씀이다. 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고 기록 되어 있다.



말하자면 예수를 알기 위해서 영생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고 그 아들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 한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을 알고 그 아들을 완전히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없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는동안 예수님을 완전히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고로 예수님과 하나님이라 하는 진리를 깨달으려면 무궁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알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게 될려면 영생이 필요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영생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 다음에 예수께서 무엇이라 말했는가 하면 당신이 내게 준 그 사람에게는 영생을 줄 것이다 그런 말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준 사람한테는 영생을 준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에서 믿음이다 신앙이다 말하지만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준 사람 즉 하나님께서 믿도록 만들어준 사람 외에는 제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신 종교 기독교에서는 될지 모르지만 참 기독교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준 사람 외에는 안된다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우리가 말하는 신앙이나 믿음 같은 이것은 천성이라는 말이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천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저들에게 영생을 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원리, 진리는 우리가 말하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말은 성경 원전에는 없다.
원전에 나오는 ‘피스토스’는 영어의 believe와는 전혀 다른 뜻이다.
이와같이 오늘날 기독교는 중요한 구절이 오역 또는 왜곡되어 있는 곳이 있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천성을 발휘하는 것이, 개발시키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으로 되어야하는 것이다.
이제말한대로 영생은 아버지와 그 아들을 알기 위함이다.
안다는 것은 지식을 말한다.
모른 것을 덮어놓고 믿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신앙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아버지와 그 아들을 알기 위함인 것이다.
알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영생이 절대로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진리의 인식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런고로 오늘 아침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이제 아버지와 내게 영광된 시간이 된다하는 말 가운데는 진리 이외의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각종 비리 시기, 거짓 종교, 난무하는 거짓, 부조리 등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는 철두철미하게 예수님의 진리의 완결판이다.
이 지구상에서 마지막 끝을 맺는 가장 중대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 십자가위에서 하나님의 영광된 시간, 예수의 영광된 시간이 성취되지 않았던 들 우리에게는 영생의 희망도 없었을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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