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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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함께 할 때에 떡을 떼어 나눠주고, 또 같은 모양으로 포도주를 잔에 나눠 주면서 하는 말이 이것은 내 몸이요 내 피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이 너희들은 내 몸 즉,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이다.
이 말인즉슨, 예수님의 살과 피는 일종의 양식이라는 의미이다.
바꿔 말하면, 내 살과 내 피는 나의 생명이다 그런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의 생명을 너희의 양식으로 삼아 먹고 마시라 라는 의미인 것이다.
살과 피는 생명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생명을 너희에게 준다 그런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양식으로 준다.
너희 생명의 양식으로 준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와서 알아들을 귀 있는 사람들에게 천국에 관한 진리를 전해준 다음 마지막으로 자기의 몸과 피를 즉,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주니 먹고 마셔라 라는 당부의 말인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내 생명체를 준다고 말해주었던 것이다.
즉,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라 라고 분명히 말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로마서 5장 8-11절에서,
예수님은 어린 양으로서 유대의 민족 신과 유대인들의 화목을 위한 제물로 바쳐졌고, 그의 흘린 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이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요체가 바로 그것이다.
바울은 나아가 돌감람나무 가지 격인 이방인도 자신이 말하는 그 믿음을 가지게 되면 참 감람나무 가지 격인 유대인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흘린 피를 여호와의 유대인들을 위한 사랑의 확증으로까지 귀결시키고 있다.
로마서5:8~11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하기를 내 몸과 피를 너희에게 준다.
너희는 그것을 먹고 마시라 했다.
반면 바울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여호와 신에게 화목제물로 바쳤다라고 주장한다.
엄연히 결이 다른 딴소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세계 기독교가 명확한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채 오직 바울의 저 말에 기초한 맹목적인 믿음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 형편이 심히 딱할 따름이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이 있는데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사는 그 생명이 무슨 생명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또 한 가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생물학적인 우리의 생명은 예수님이 주시는 살과 피를 양식으로 삼을 수 없다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내 살과 피를 너희의 생명의 양식으로 준다 하는 것은 우리의 생물로서 태어난 생명의 양식이 아니고 예수께서이 세상에 내려주는 생명인 것이다.
동물과 하등 다를 바 없이 태어난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이 내려준 씨가 자란 사람, 다시 말하면 위로부터 난 사람만이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고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온 목적 중 하나인 것은 바로 우리 인간에게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 생명은 이 세상 것으로서는 성장 해 갈 수가 없고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그 생명이 살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특별히 다른 생명의 양식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양식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예수께서 말한 내 살과 피라는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이 세상에 와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면서 그 생명이 먹고 자랄 수 있는 양식을 공급해 주지 않는다고 하면 그 생명이 무슨 수로 자랄 수 있겠는가!
오늘 여기본문에서 예수께서 떡과 포도주를 주면서 가롯 유다에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잡아 주는 사람, 즉 배반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가롯 유다도 역시 예수님이 주는 떡과 포도주를 받아 마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가 먹고 마신 떡은 한낱 세상의 떡과 포도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롯 유다는 스승인 예수님을 여호와와 그의 종들에게 내어 준 역사 이래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잡아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을 내려 창자가 터져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런 것이 아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이 잡혀간 것을 보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극도로 고통스러워하는 바람에 자결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예수님의 아버지 되시는 참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실 분도 아니고 또한 하실 수도 없다.
예수님은 가롯 유대를 보면서 네가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가롯 유다가 나지 않았다면 예수님가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단지 유다 너는 이 사건으로 인해 좋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었을 뿐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가롯 유다를 12제자로 택한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과연 유다가 그런 자질의 소유자임을 몰랐을까?
예수님이 몰랐을 리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 상대적으로 영리하고 이해타산에 밝은 사람이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 일행의 재정을 맡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왜 그 같은 일을 하게 됐을까?
나는 가롯 유다가 이스라엘의 장로나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해 늘 부족했을 예수와 그 일행의 재정을 확보하려 했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롯 유다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붙잡혀 갈 정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가롯 유다가 아는 예수님은 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 먹였고, 일평생 일어나지 못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는가 하면 죽은 자 까지도 살린 능력자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그가 잡혀갈 리가 있겠는가 하고 단순히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간단히 무리 중 누가 예수님인가를 알려주기만 하면 손쉽게 은전 30데나리온이 생긴다 하는 정도만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덮어놓고 나쁘다고만 볼 수 없는 영리한 사람의 행동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영리하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 어리석은 행동도 종종 서슴치 않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가롯 유다 역시 자신은 대단히 영리하다고 착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잡혀갈 사람이 아니니 그냥 가르쳐주고 돈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직임을 생각했을 때 받을 그 돈을 모두 자신이 쓸려고 한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이나 오늘 날 사회에서도 그런 짓을 하고도 살아 갈 길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가롯 유다 때문에, 또는 장로들이나 제사장들이 죽이려 해서 그 길을 간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다만 그 십자가의 길을 통해 자신의 본향으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그런데 그 길을 가는데 있어서, 부수적으로 이 세상의 악을 조장하는 그 신과 그에 관계하는 인간들의 죄상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있어 그 참혹한 고통의 길을 스스로 택했을 뿐이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유대나라로 들어오지 않았던들 죽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자신이 그 자리를 피했더라면 역시 죽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확실히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길 “나는 내 생명을 던질 수도 있고 다시 회수할 수도 있다” 하신 것이다.
오늘 날의 기독교가 이천년의 역사를 이어 오면서도 예수님의 이 한마디 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가롯 유다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영리한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어느 정도 알았지만 그러나 그 이상의 예수님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자칫 잘못하면 가롯 유다와 같이 예수님을 팔아먹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날 기독교 지도자들이나 신자들이 가롯 유다와 같이 예수님을 팔아먹고 있지 않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가롯 유다를 두고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했지만,
이 말은 당시 제자들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가롯 유다가 지금까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았고 앞으로도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가롯 유다에 대해 나지 않았다면 저에게 좋을 뻔하였다 라는 정도의 말을 했을 뿐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그 말은 바로 가롯 유다를 향한 탄식의 말인 것이다. 저주의 말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탄식의 말은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이 장차 많을 것임을 미리 말해주는 것으로 봐야한다.
오늘 예수님은 떡과 포도주를 들어 이것이 내 살이고 내 피, 곧 너희가 먹고 마셔야할 양식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참 생명인 나를 먹고 마셔야만 너희 안에 내가 심어준 나와 같은 본질의 그 생명이 자랄 수 있다 말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온 이유는 아버지로 부터 새로운 생명의 그 씨를 받아 이 세상에 뿌리기 위함이었다.
또 한가지, 내 생각에는 예수님은 새로운 생명의 씨를 뿌린 곳이 이 지구만이 아니라고 본다.
이 광활한 우주의 수많은 곳에서도 이와 동일한 사역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생명의 씨가 우리에게 뿌려지면 이것이 자라기 전에는 별 다른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뱃속에 있는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살과 피를 먹고 자란 것을 느끼지 못한 것과 비슷한 것이다.
예수님이 내게 주는 양식은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내게 오는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내게 준다는 말은 내게 새로운 생명을 준다는 의미인 것이다.
예수께서 주는 새로운 생명은 이 세상 떡이나 물로 살지 못한다.
예수께서 주는 생명은 예수님이 주는 양식으로만 산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뿌린 씨가 움이 트고 자라 예수님 앞으로 나아온 자들,
달리 말하면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에게 공급되어지는 예수님의 이 살과 피는 마치 어머니가 아기에게 주는 젖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자라지만 가롯 유다처럼 도중에 유산된 아이같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가 먹고 마셔야 할 필수적인 양식이긴 하지만 그 양식이 어떤 본질을 갖는 양식인가 하는 것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함으로 다음에 따로 설명하기로 하겠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