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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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기적은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었다.
당시 예수님의 나이가 대략 서른 살 정도 되는 무렵이었다.
그런데 매우 특이한 점은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 생활에 대해서는 복음서에 기록이 전혀 없다.
공생애 이전 예수님의 생활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대단히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것과 관계된 시간이었고 예수님은 그때 이미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달성했다고 나는 보는 것이다.
복음서에 그와 관련한 기록이 없는 것은 그 일이 바로 제자들과 그들 조상들의 신 여호와의 처리 문제와 관계된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과 관련하여 제자들에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보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이 가나 혼인 잔치에서의 기적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월절이 가까워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의 일인 것이다.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은 유월절이다.
이 절기는 유대인의 선조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땅에 들어오기 전까지 광야에서 어렵게 지내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예수님 나기 전 1300년 전으로부터 시작된 축제인 것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의 도움으로 애굽을 탈출한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일이며 유대력의 아빕월(유대달력으로는 “니산월” 正月)14일 저녁부터 시작해서 7일간 계속된다.
아빕월은 지금 우리 달력으로는 3-4월 사이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여러 가지 명절 중 단연 가장 큰 절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2장 13-22절의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소탕(掃蕩)한 일에 관한 기록이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두 번에 걸쳐 성전 소탕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에 관해서는 마태복음 21장 12-17절, 마가복음 11장 15절-19절, 누가복음 19장 45-50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중 오늘 이 본문이 그 첫 번째 내용이며,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공중생활 중 행한 첫 일이 바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소탕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이전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마리아의 요구로 포도주를 만들어 준 일이 있지만 그 일은 예수님의 계획에 있던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요한복음 2장 5절의 예수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요2:5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예수님에게 있어 공중생활의 첫 사업은 바로 성전을 소탕해버리는 일이었던 것이다.
오늘 내용이 첫 번째 성전을 소탕하는 일이고 이제 지적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내용은 두 번째 성전소탕에 관한 내용이다.
그리고 세 번째 유월절 시작 전날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공중생활을 보낸 시간은 햇수로는 3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년 반에서 이년 정도 되는 것이다.
그 근거가 되는 것이 오늘 읽은 성전 소탕에 관한 기록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생애 기간의 첫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소탕했고, 그 이듬해 또다시 올라가 한번 더 같은 일을 반복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다.
예수님은 왜 일년 반 남짓한 정도의 시간 동안만 이 세상에 계셨는가?
이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곤란한 문제였다.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는 이 문제를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앞서 말한대로 복음서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의 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명령 하신대로 이스라엘 민족신 여호와와 관계된 일을 완수하셨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일을 완수하신 이후,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짧은 기간 동안의 사역은 아버지께서 명하신 또 다른 명령 즉, 우리 인간의 구원에 관계된 일을 완수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 일은 우리 인간을 위한 일종의 부가적인 일인 셈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한 이 일을 서둘러 마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서둘러 자신의 본향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는 안식일에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5:17)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 역시 천국의 일을 아버지와 함께 해야 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와에게 제사 지내는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고 상을 엎어버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 하나는 예수께서 이 일을 행했던 곳은 헤롯 성전에만 있었던 ‘이방인의 뜰(Gentile’s Court)’이었다.
따라서 성전 안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행한 이 일은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또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 절기는 인근 각국에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날이었고 그들 역시 성전에 제물을 바쳐야 했다.
그런데 성전에 사용될 제물을 자기가 사는 나라에서 직접 가져오기는 뿐만 아니라 엄격한 “코셔(Kosher)”기준에 맞아야 하기 때문에 성전의 특정한 구역 즉 ‘이방인의 뜰(Gentile’s Court)’에서 구입하는 것이 관례화되었는데 이때 화폐는 반드시 이스라엘 화폐만 허용되었다.
그러므로 로마나 인근 나라의 화폐를 환전해주는 환전소도 그곳에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성전의 특정 구역에서 환전하는 일이나 제물을 사고파는 행위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그 일을 행했던 것이다.
그것은 환전하고 제물을 팔아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일에 여호와를 섬기는 레위 족속 및 제사장이 관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을 소탕한 그 다음에 한 말이 유대인을 더 크게 자극시킨 것이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한 것이다.
유대 말의 이 사흘은 사흘 뿐만 아니라 아주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이것은 영어로 말하면 하나의 속담격인 언어이다.
그런데 그 성전은 유대인들이 46년간에 걸쳐 지어 놓은 집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이 성전은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미 46년간에 걸쳐 지어오고 당시에도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건축은 모두 세번 있었다.
솔로몬이 세운 성전이 첫 번째 그것이고, 바벨론 포로기 이후 총독이 되어 돌아온 스룹바벨이 지은 성전이 그 다음 것이고, 마지막으로 헤롯이 BC20년 무렵부터 짓기 시작한 예수님 당시의 성전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헤롯 성전을 향해 이 성전을 허물라는 예수님의 말은 이스라엘의 성전이 보기 싫다는 말인 것이다.
성전은 역사적으로 유대인들 삶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성전을 허물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행동과 말 모두 유대인들을 심각하게 격앙시키기에 충분 하였던 것이다.
또 한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오늘 요한복음서 본문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현재 기독교 역시 예수님이 말한 이 사흘과 다시 짓겠다는 말을 예수님의 사흘간 무덤 속에 있었던 일과 그리고 부활한 것에 결부시켜 해석하고 있지만 그것은 터무니없는 말일 뿐이다.
그런 것이 아닌 것이다.
오늘 본문 17절에서 22절까지의 기록은 요한의 기록이라기 보다는 훗날 교리에 의해 왜곡되고 첨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앞서 말한 대로 두 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유대인들의 성전을 소탕해버렸을까?
무슨 사연이 있길래 각종 병든 자와 주린 자를 불쌍히 여겨 빵을 만들고 배불리 먹였던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던 앞서 살펴 본대로 아무런 잘못 없는 상인들을 소탕해버렸을까?
그리고 예수님은 마음만 먹었다면 그깟 돌로 지은 유대인들의 성전 정도는 그 자리에서 바로 부수어버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이 오늘 우리가 알아야 할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바로 성전을 부수어버렸다면 예수님은 곧장 돌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이 아직은 세상에 좀 더 있으면서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그것을 실행하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난 후 예수님은 자신이 한 말 그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 성전을 허물어 버렸던 것이다.
마태복음 27장 51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성소의 휘장이 두 쪽으로 찢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마태 27:51그런데 보아라,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성전은 지성소 바깥에 구분된 뜰이 두 곳 있는데
성전내 ‘유대인들의 뜰’과 성전 바깥 ‘이방인들의 뜰’이며 이 두 곳은 엄격히 구분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성소는 가장 안쪽에 위치하며 그곳은 그 해의 대제사장만 출입할 수 있다.
그런데 솔로몬 성전에는 다윗이 그곳에 안치시킨 법궤가 있었지만 스룹바벨 및 헤롯성전에는 이 법궤가 없었다.
법궤가 유실되어 그렇게 된 것이다.
처음솔로몬 시대의 법궤 안에는 모세가 받은 십계명과 만나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갔다고 구약의 기록은 증언한다.
그리고 그 법궤를 두 그룹천사의 날개 형상이 덮고 있고 있었다.
그리고 더 안쪽에는 여호와의 보좌가 놓여 있다.
여호와가 내려오면 그곳에만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약속과 명령에 따라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 헤롯성전의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법궤를 지키는 형상의 그룹이 무너졌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휘장이 찢어지지 않는다.
제자들이 그 말을 자세하게 기록 못해서 그렇지 법괴가 뒤짚어지지 않고는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질 않는다.
그러므로 그 사건은 예수님이 성전을 소탕해버렸듯 성전을 무너뜨려 버린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또한 제자들이 성전의 공사가 잘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예수께 말한 것이다.
자랑해서 잘 지어진 성전을 예수님 앞에 이야기했을 때 이 성전이 돌위에 돌 하나도 남지않고 부서질 것이다. 예언한 것이다.
과연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무너질 것이다 라는 예수의 예언대로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된 채로 잿더미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오늘 이 말들을 다시 종합해 보면 예수님은 공중생활에서 두 번 성전을 소탕했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갈 때는 지성소를 뒤집어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지성소가 없는 성전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저 성전을 그렇게 혐오했는가?
이것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이 바로 서는 것도 이 사실을 바로 아는 것에 달려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심지어 교인들이 모여 예배하는 예배당을 일컬어 성전이라 말하고 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예배당은 예수님이 혐오하였고 또 부숴버렸던 저 이스라엘의 성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예배당은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공간 즉 일종의 회당일 뿐 예수님이 무너뜨린 성전이 결코 될 수 없다 그 말인 것이다.
바울이 주장한 대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든가 혹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말도 예수님이 한 말이 아니다.
교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조작한 구절인 것이다.
예수님이 정말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왔다면 왜 그 짧은 일년 반 남짓 밖에 이 땅에 머물지 않았을까?
적어도 복음서의 말대로 예수님이 이 세상을 위해 왔다면 그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우리 곁에 있어주어야 했을 것이 아니냐 하는 말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빛이라 말했지만, 비록 우리가 그 말을 통해 일말의 단서는 찾을 수 있을지언정 그 말의 의미에 대해 직접적으로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을 통해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부터 받은 이 땅과 관계된 사명을 완수하신 후 서둘러 본향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귀환 후 남게 될 이 땅의 인간들의 운명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중 비록 극소수라 할지라도 천국으로 이전될 수 있는 길을 여는 시간-우리가 아는 공생애 기간을 추가로 갖기로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 시간을 무한정 길게 가질 수는 없었다.
서둘러야 했던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학교를 다니는 햇수만 해도 대학원까지 한다면 20여년이나 된다.
그런데 20년을 걸쳐서 배운다 해도 그 아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따라서 예수께서 1년 반정도로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쳐 보아야 깨달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예수님은 진리다라고 말했는데 그 진리는 오늘날 철학이나 과학보다 몇 단계 더 높은 심오한 학문의 세계 같은 것이다.
진리가 그렇게 심오할 것으로 본다.
그것을 예수님 당시 무식한 제자들에게 가르쳐 보아야 알 수 있었겠는가?
현대의 과학보다 몇 배나 더 힘든 원리(principle)을 제대로 수용 못했을 것이다.
그 말들이 그대로 전달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진리라 표명했다. 그런데 그 진리는 현대의 철학이나 과학보다 훨씬 더 높은
심오한 차원의 세계인 것이다. 그것을 당시 무식했던 제자들에게 가르쳐 보아야 알아들을 수 있었겠는가?
틀림없이 제대로 그 원리들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또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천국에 관한 말들을 제자들이 겨우 알아들을 만한 수준으로 그 정도를 낮춰 가르친 후 저 세계로 가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무엇인가 하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에게는 일생일대의 기념비적인 한가지 일이 그로 말미암아 성취된 일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줄기’가 형성된 것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비로소 형성되기 시작한 전에 없었던 생명의 줄기 즉, 물과 공기가 그것이다.
영어성경에는 공기를 영으로 표현했지만 원어를 보면 물과 공기 즉 액체와 기체라는 뜻이다.
즉 액체와 기체로서 사람이 다시 나지 않는다면 제 세상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세상 사람들이 아는 이치로 비유하신 말인 것이다.
이 세상의 씨는 움틀려면 반드시 물과 공기가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우리 가운데 뿌린 씨 역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물과 공기 같은 것으로 싹이 터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기에 예수님이 뿌린 그 씨를 움트게 할 물과 공기가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공급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씨와 움튼 싹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 자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 공급할 수 있는 그의 살과 피 곧 그의 젖으로만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심어 준 그 씨가 움트고 이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그 정도가 적어도 30퍼센트 60퍼센트 혹은 100퍼센트 자란 사람, 다시 말해 저 세계로부터 받은 새로운 생명의 줄기를 소유한 사람은 그 생명의 본질이 이 땅의 것이 아니기에 저 세계로 옮겨가야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 가운데 새로 생긴 법칙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 제자들을 택해 일 년 반 남짓한 시간을 함께 계셔 주셨고 이후 본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큰 의무는 예수님의 자기 본질에 관한 표명인 저 진리, 길, 빛, 생명을 탐구하는 일이다.
그것을 모른다면 우리는 모두 희망 없는 인생인 것이다.
혼자서 탐구해서 안된다면 서로 토론하고 또 먼저 깨달은 사람에게 듣기도 하고 하여 완전히 다 못 깨달아도 그 일단이라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일 때 이 진리를 가르쳐 주는 스승을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도록 되어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너희에게 보혜사(counsellor)를 보낼 터이니 그 보혜사가 너희를 도와서 깨닫고 아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단 한가지는 준비가 그 만큼 되어 있어야 하고 노력이 그 만큼 필요하다.
교회에 나가 몇 푼의 돈이나 내고 복 받겠다는 수단으로서는 이런 깨달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저 예수님의 본질에 관한 표현인 진리와 길 빛과 생명은 결코 그저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깨달음의 영역인 것이다.
우리는 저 말을 깨닫기 위해 일생 동안 내 모든 노력을 기울일 때 예수님이 약속한 대로 그의 말을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는 보혜사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