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기꺼이 버리기 때문이다.
18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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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예수님으로부터 이행되며 구원의 완수 역시 예수님께서 하신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구원은 예수님에게서 시작되고 완수되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께서 하신 일과 가르침의 모든 진수를 완전하게 깨닫기는 대단히 힘들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복음서는 크게 보면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소위 공관복음이라는 마태, 마가, 누가가 전한 복음은 예수께서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해준 것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이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천국에 관한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다뤄진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그 내용과 기록의 목적이 사뭇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관복음에는 구원받을 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규정해 주고 있고,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는 없는 구원과 천국에 관한 이치와 원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공관복음에는 구원의 이치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기록이 없고, 또 반대로 요한복음은 구원을 얻을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 까닭은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요한복음서에는 있는 구원에 관한 그리고 천국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깨닫기 힘들었고 따라서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은 그런 말씀을 기록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요한은 구원받을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특별한 언급이 없다.
그것은 다른 제자들이 이미 그 말씀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 있고 또 요한 자신은 그것이 구원의 원리 천국의 원리에 비해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기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그러므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서는 그 성격이나 내용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구원받은 혹은 받을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말하자면 신앙적 윤리관에 관해서는 마태복음에 비교적 잘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는 주로 그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가지 말해 둘 것은 그 말씀들을 그저 읽고 이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구원받은 혹은 받을 자라면 그 말씀 그대로 힘닿는 한 충실히 지켜야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마태복음 5장 38-42절에서 예수께서는 “네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도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도 주고 오리를 가자 하거든 십리를 동행해주라”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요 형제된 사람들의 생활에 있어서의 실천에 관한 말씀인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분명한 언명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장차 구원을 얻을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정신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오른쪽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줄 수 있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줄 수 있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힘이다.
힘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힘이 있어야 그 같은 일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태5:38~42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그런 힘은 예수께로 부터 부여받는 이 세상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정신적인 능력이다.
이 힘 없이 그저 세상 여건에 기대어서는 결코 그 같은 일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런 일을 해주는 것 만큼 반드시 그 가치를 잃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열매 없는 무가치한 그런 생활을 대단히 경계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주를 개나 돼지에게 던져주면 짓밟혀 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누군가가 내 오른편 뺨을 칠 때 왼쪽 뺨 마저 돌려댈 때에는 그 사람에게서 그만한 가치를 발견한 때라야 그렇게 하는 것이다.
신자는 이를테면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사람에게 겉옷마저 주는 그런 행동 하나를 할지라도거기에는 반드시 그만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는 그 생명에 대한 가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모두 그 가치를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 가치가 없을 때는 무의미한 것이다.
또한 마태복음 7장 7-8절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구하고 찾고 두드려라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이 세 가지 말은 다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너희는 노력의 인간이 되라 하는 것이다.
왜 문을 두드려야 하는가?
이 우주는 현재 문이 닫혀있기 때문이다.
보통사람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마태7:7~12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항시 사람은 자기가 걸어가는 길을 똑바로 걸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어디가 동쪽이고 어디가 서쪽인지 전혀 분간을 못하고 있다.
그렇게 될려면 항시 문을 두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저 앉아 있어서는 모른다.
이 세상 나아가 이 우주는 지금 어떻게 되어 있으며, 이 세상의 운명은 어떠하며, 나아가 천국은 어떤 것이며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도 그저 기독교 단체에 소속되고 기도나 한다고 해서 저절로 알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샅샅이 찾고 탐사를 해야 한다.
땅속에 묻혀있는 금이나 은을 찾으려 하는 것 보다는 진리의 핵심을 찾으려 노력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이고, 또한 항시 구하는 자세로 모든 정신을 가다듬어 예수께로 부터 얻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하고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항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 3가지 자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절대적 조건인 것이다.
우리는 젊었을 때 정신력이 있고 힘이 있을 때 시간을 헛되이 보내면 안 된다.
우리의 전 시간을 들여서라도 진리를 찾는데 쏟아야 한다.
사람이 늙으면 무용지물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젊을 때 한 시간이라도 아껴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다시 정리하면, 공관복음은 주로 예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의 생활규정을 말씀하신 것을 기록해둔 책인 것이다.
물론 그 기록 역시 우리가 그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 속의 예수님의 말과 행동 역시 진리와 생명과 빛의 세계의 원리와 원칙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의 이치를 기록한 요한복음서의 오늘 이 구절은 참 심각하고 보통사람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말씀인 것이다.
서두에서 말했지만, 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말씀 중 핵심이 되는 천국에 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천국,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이 온 우주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완수하신 일인 것이다.
이 세상에 종교도 많고 학문도 많지만 예수님 외에는 절대 이와 같은 일을 완수할 수 없는 것이다.
첫째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하늘나라에서 이 땅에 닿은 길을 만들어 놓았다.
하늘 즉, 천국 다시 말해 하나님이 계신 곳과 인간사회가 서로 닿는 그 길을 예수께서 마련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길을 통해 인간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이땅에 인간도 많고 역사도 오래되었지만 그 길은 전에 없었던 길이다.
다시말하면 예수는님은 길을 완수하신 분이셨다.
다음에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사람뿐 아니라 이 세상의 생물도 일정 기간을 지나면 소멸되도록 되어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주신 법이다.
인간은 그 수명이 오래 살아야 백년 남짓이다.
그 정도 살면 대개 흙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그런고로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나면 그 다음은 죽음인 것이다.
모름지기 사람다운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가장 큰 고민이며 문제는 결국 죽음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오신 다음 특수한 사람에게는 죽음이 없는 영생의 세계를 만들어 주신 것이다.
예수님 외에는 영생의 세계 영생의 이치를 만든 분이 없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나는 부활의 이치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예수님 오기 전에는 부활이란 없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운명적으로 걸어야 했던 그 죽음의 길에서 다시 살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신 분이 바로 예수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소리쳐도 부활을 쟁취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너무나 비참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 부활도 기독교에서는 여호와가 시켜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완수하신 일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이치를 아직은 말할 수 없다.
여러분이 못 알아들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은 “나는 생명을 버릴 수도 있고 다시 쟁취할 수도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생명을 버릴 수도 있고 이 생명을 다시 회수할 수도 있다 그런 말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죽음 다음 부활 역시 내가 할 수 있다 그런 말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부활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 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는가? 도저히 보통으로는 이해가 되지않는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님의 그 말씀은 그 자신의 본질이 진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말이었다.
예수님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진리 속에서 모든 것을 완수하였고 그 진리 속에서 다시 부활할수 있게 되어있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 속에서 부활하는 이치를 만들어 놓은 까닭에
자신이 정한 시기와 정한 방법으로 정한 장소에서 죽고 마찬가지로 정한 시기와 장소에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거니와 예수께서 미리 이치 가운데서 계획하시고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는 말이 나는 생명을 버릴수도 있고 다시 쟁취할수도 있다 한 것이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생명을 다시 얻는가?
이 세상의 이치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것이 진리 속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부활을 마련해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부활을 두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켰다 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은 그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을 버리는 것도 내가 버리는 것이고 다음에는 내 생명을 다시 쟁취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을 마련해 놓으면 모든 것이 그대로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온 다음에 무슨 길이 생겼는가 하면 성령을 우리에게 보낼 수 있게 되는 길이 생긴 것이다.
이 성령을 예수님 이전에는 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세상에 왔다 가신 이후로는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것 역시 예수께서 완수해 놓으신 것이다.
다음에는 하나님과 예수 믿는 사람 사이에 통화가 가능하게 된 이치를 완수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통화가 절대 될 수 없었다. 없는 것이 원칙이었다.
설혹 통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하나님인지 귀신인지 구분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 오기 전에는 잡신들이 인간들을 그렇게 농락하게 된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왔다가 가기 전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어떤 통화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온 이후로 비로소 가능해졌는데 인간 가운데서도 특별히 신격을 갖춘 사람은 통화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