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교회
 
작성일 : 16-09-10 08:23
설교제목 : 예수님의 행동
 설교일자 : 1993.07.18
 KEY WORD : @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영광
 성경구절 : 요11:01~16
 관련구절 :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983  


0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0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0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0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0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0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0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0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0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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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장부터 그 이후는 예수께서 어떻게 자신의 십자가 죽음의 길을 걸어갔는가에 관한 기록이다.
그것에 관한 마태복음의 기록들은 훗날 교회가 만들어낸 조작들이 많이 삽입되어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 보다 비교적 상세하고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록들을 검토해보면 우리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보통 어떤 사람에 관한 기록은 그의 마지막에 관한 기록들이 비교적 상세하게 담겨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에 관해서는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전혀 없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는 것에 관한 도입부를 오늘 본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그의 죽음 그리고 그의 부활에 관한 기사가 있지만, 사복음서 모두 그의 종말(終末)의 정체성(identity) 대해서는 그 기록이 없는 것이다.  
이런 일도 대단히 이해하기 힘든다.
그리고 또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하는 말 역시 마찬가지로 보통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 당시 나사로가 살던 집은 베다니에 있었고 당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 세례를 베푼 곳 즉, 또 다른 베다니에 있었다. (요10:40절)
그리고 하필이면 그때 나사로의 병이 위중해져 죽음에 가까이 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누이들이 요단강 저편의 베다니에 계셨던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 전한 것이다.



그런데 그 전언을 들은 후의 예수님의 반응 역시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친구가 병이 들었다 하는 소식을 들었지만 아무런 조처없이 오늘 본문에서 본대로 이틀 동안 그 자리에서 머물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틀 후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가서 깨워주어야겠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었으면 깨어날 일이지 않습니까? 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당신 말대로 나사로가 잠들었다면 괜히 당신을 돌로 처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있는 그곳으로 갈 것이 무엇입니까? 하는 말인 것이다.
이때 비로소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벌써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 전에 이미 죽은 것을 알았다.
그런데 제자들을 보고는 죽은 자가 잠들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은 도마는 그렇다면 우리도 주와 함께 가서 죽으러가자(요11:16) 한 것이다.
도마가 예수님을 비꼬는 말인 것이다.
이와같이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이나 말에 대하여 그 진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오랜 기독교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연구하고 알고자 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오늘 여기서도 예수께서 나사로가 잔다고 하니까 도마가 나서서 그렇다면 우리도 죽어보자는 식의 냉소를 보내는 것이다.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 그리고 행동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해가 힘든 예수님의 한 말씀은 나사로가 병든 까닭은 그로 말미암아 내가 영광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당시 제자들로서는 대단히 이해하기 힘든 말인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오늘 여기 요한복음서에 기록되어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오늘 본문의 내용이 제자들에게 쉽게 이해되었고 그것이 훗날 유대의 전통신앙과의 조화되지 않는 말씀이었다면 변조되거나 혹은 삭제가 되었을 것이다.



예를들면,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즉, “내 신이여 내 신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말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면서 자기를 살려주기를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이런 비참한 말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이런 말을 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 말은 비록 인간이 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졸장부의 소리인 것이다.



내가 이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안중근은 사형을 당하기 몇 시간 전까지도 자기를 방문한 사람과 점심을 나누어 먹고 태연하게 사형장에 올라갔던 것이다.
인간인 안중근도 그와 같은 비겁한 소리를 하지 않았다.
또 안중근은 인격적으로 대단히 훌륭했기에 형무소가 개방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누구든 안중근을 면회하거나 글을 받아가곤 했던 것이다.
그 형무소 소장은 일본에 간 후에도 안중근을 자기 집의 神으로 모셨고 그것이 오늘날 그 후손에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 내 신이여 내 신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그런 비겁한 소리를 했다면 우리가 따를 수 있겠는가?
기독교는 성경은 이와 같이 조작하였고 그 결과 지금 우리는 더더욱 예수님을 몰라보게 된 것이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고 죽은 나사로가 잔다고 했고, 또 그 나사로를 두고 일어날 일이 아버지와 나를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 생각은 간데 없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 같은 말들이 모두 예수님을 이해하기 힘들게 만드는 것들인 것이다.



요한복음 11장 17절부터 다시 이어서 보면,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베다니에 들러 죽은 나사로 집을 방문한다.
예수님은 나사로 있는 곳을 찾을 때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는 죽은지 이미 오래되어 냄새가 나므로 이제 당신이 오셔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하는 정도의 말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무덤돌을 열려할 때 열 필요가 없다고 반응한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38절에서 44절까지에서 보면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려 무덤에서 꺼낸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도 우리가 절대 그냥 넘어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어서 냄새나는 사람을 일으키지 못한다.
지금 기독교는 죽은 육신이 부활한다 말하지만 그것은 터무니없는 바울의 사상일 뿐이다.
사람이 죽어 육체가 썩으면 그것은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다시 일으키지 못한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에는 죽어서 그 몸이 썩은 사람이 다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사로는 다시 일어났다. 
따라서 예수께서 나사로를 불러내었다 하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사항에 대하여는 다음에 이야기 할 것이다.



문제는 내가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나왔다가 얼마간 살다가 예외 없이 모두 죽는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교훈과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쓴 글은 아무리 읽어 보아야 ‘죽지 않는 나’ 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도 읽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예수님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 속에는 예수님을 알 수 없도록 훼방하는 조작된 글들이 삽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있다가 나사로가 이미 죽어서 무덤 속에 냄새나게 될 때야 비로써 그곳으로 간 것이다.
가면서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다 한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린 일부터 시작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련의 사건들은 예수님 본인이 계획하고 만든 그동안의 인간의 육신을 벗어던지는 죽음의 길이며, 동시에 본향으로 가는 회복의 길인 것이다.
예수께서 죽음의 길을 가면서 하는 말이 인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는 날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도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제 내가 죽음의 길을 떠나는데 그 길의 끝에서 영광을 받게 된다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가면서 인자가 영광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내신이여 내신이여 왜 나를 버리십니까? 라는 비참한 말, 원망의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조작된 기록인 것이다.
종래(從來)의 유대 사상으로 예수님을 조작해버린 것이다.
이런 조작품을 만들고 있는 현 기독교는 예수님을 알 수가 없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날 기회를 죽은 나사로를 일으켜 세움으로 포착한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내가 영광을 받을 때라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다 이루었고
이제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바로 그 말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좀 더 이 세상에 오래 계시면서 진리에 대해 가르쳐주고,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인간적인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그의 고향이 아니다.
따라서 자기 본향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올 때에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을 처리해야 할 특별한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한다는 말은 예수께서 이 땅을 떠날 때 그 일을 다 완수하였고, 그것으로 예수님은 천국에서 독생자의 위치를 획득하였다는 뜻을 품은 말인 것이다.




이제 예수님이 저 세계로 떠남으로 이 세상 인간들이 예수님을 인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 있는 인간으로서만 아무리 설명해 보아야 완전히 인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저 세계로 가는 커다란 사건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다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 까닭을 인식하는 정도가 곧 예수를님을 인식하는 깊이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자기 스스로 정한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서 자기 본향으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사는 온 인간들에게는 광명의 세계가 도래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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