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교회
 
작성일 : 16-09-13 09:20
설교제목 : 예수님의 행적
 설교일자 : 1993.07.11
 KEY WORD : @ 돌 율법 신 신성모독
 성경구절 : 요10:31~40
 관련구절 :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411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39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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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궁극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을 아는 것 외에는 그렇게 대단한 것은 없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 외에는 크게 따지고 보면 대부분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
또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자기를 알라한 그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와서 무슨 그럴듯한 말이라든지 세상을 살아가는데 교훈이 되거나 푯대가 되는 그런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어떤 세상이 바람직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된다든지 하는 그런 언급은 없는 것이다.
간혹 다른 사람들이 물어올 때 그 비슷한 말을 한 적은 있으나 실제로는 예수님은 이 세상 살아가는 것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을 성인이다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으나 확실히 예수님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다.
예수님의 말을 종합해 보면 결국 영생에 관한 것이다.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나서 생명을 계속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싫든 좋든 간에 내 생명은 없어진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소리쳐도 소용없는 것이다.
그 분명한 사실을 인간이 인식하든 못하든 그렇게 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시간이 오면 예외 없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사는 방법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였는가 하면 뜰에 있는 백합화도 창조주가 다 살도록 해 놓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너희 인간도 자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세상살이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일관된 예수님의 말씀은 오직 ‘생명’의 길에 관한 것이었다.



그 생명은 태어나고 죽고 하는 그런 생명이 아니다.
생명이란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한다.
산다 하는 것은 시간의 제약이 없어야 한다.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면 그것은 생명이 아니다.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은 것이 참 생명인 것이다.
예수님은 때가 되면 없어져야 하는 그런 생명에 대해 말하러 오신 분이 아닌것이다. 
그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은 존재의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위해 여러 모양으로 가르치고 행동하셨던 것이다.



물론 이 세상과 사람들이 완벽하고 영원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예수님은 필요 없다.
그러나 인간은 물론이고 이 세상도 영원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이 근본적으로 알아야 할 대상은 예수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가르쳐서 저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이끌어가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와서 가르친 근본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을 깨닫는 것 외에는 모두 쓸데없이 자기 생명을 낭비하는 일인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전전긍긍하다가 종래에는 결국 죽고 마는 것이 우리 인생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절대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 예수님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사람들에게 여러 가르침과 역사를 통해 진리와 생명 그리고 천국에 대해 많이 교훈(敎訓)해 주셨을 뿐 아니라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심지어 죽은 자 까지 살려 주셨다. 
다시 말하면 일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너희는 왜 나를 죽이려 하는가 하고 물은 것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좋은 일을 하지 않았는가?
즉 유익한 일들을 해 주었는데 왜 나를 죽이려하는가 하고 묻는 것이다.
이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한 말은 네가 사람이면서 우리 신의 아들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하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않았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상관없겠지만 만일 행하였다면 행한 그 일은 믿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인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 하시는 믿음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깨달아 아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내가 행한 그 일이 내 아버지께서 나를 통해 행하신 일임을 깨닫는다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달아 알게 되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이며, 오늘 본문의 핵심적 내용인 것이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았다. 직접 목격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한가?
지금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왔다가 본향으로 떠난 지 이미 이천년이 지났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한 일을 보지 못했고 단지 성경책의 기록으로 볼 뿐이다.
그 기록들 조차 모두 있는 것도 아니며 극히 일부분만 우리에게 전해졌다.
일부 남아 있는 기록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그의 음성을 들었던 것도 아니고 그가 한 일을 직접 보지도 못한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방법이란 없는 것인가?
그런데 그렇게 절망적인 생각으로 시간만 가고 있다면 결국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은 ‘나’인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비록 이천 년 전에 기록된 얼마 되지 않는 그 기록이나마 철저히 파헤쳐서 예수님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그 기록이 확실한 사실에 기반한 것인가 하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면 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을 먹인 사건의 기록이 그것인데,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으나 이 천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그것이 사실이었는지 사실이 아니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한 일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증명하지 않으면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의 입증 그것이 중요하며, 인식은 그 다음의 일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떡 다섯 덩이로 5천 명을 먹인 기록이 혹 조작된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행적에 관한 기록이 거짓이 아닌 사실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동경에서 공부할 때 어떤 고마운 사람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예수께서 떡 다섯덩이로 오천명 먹인 사건을 자랑삼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분은 나에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했을 때 나는 그 말에 대해 아무런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나는 오늘날까지 예수께서 하신 그와 같은 기적이 사실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수십 년간 연구해왔다.
그 결과 예수님이 하신 말과 예수가 하신 일을 종합해 볼 때 거짓이 아니라는 확고한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인식을 갖게 되기까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신고(辛苦)가 따랐음을 분명히 말해둔다.

 


그 사건에서 언급된 ‘오천’은 히브리어로 ‘하메쉐트 알라핌’이고 알라핌의 단수형은 1천을 의미하는 엘레프인데, 이 말은 1천의 의미도 있지만 그 외 종족이나 지파, 무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다섯 무리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날 그 무리들을 나눠 앉게 한 후 떡 다섯 덩이를 가지고 하늘 아버지께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었을 때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모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후에 예수님이 하신 일을 크게 자랑하기 위해서 이 말을 헬라어로 기록할 때
숫자 1천을 의미하는 킬리오이(χίλιοι)로 번역해버렸고, 거기에 더해서 열두 광주리에 차게 남았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단언컨데 그것을 남겨야 하는 어떤 분명한 교훈이 있었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분명 과장에 불과한 기록인 것이다.      
그리고 여자와 어린아이를 뺀 오천 명이라면 어림잡아도 1만명은 넘을 것인데, 로마 통치하에서 그만한 숫자가 특정한 장소에 동시에 모인다는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그러므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였다는 그 기록의 사실 여부는 반드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보통 50명 정도를 한 그룹으로 해서 앉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마가복음 6장 40절에 보면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이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오천 명은 아닌 것이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이 오천명을 먹였다는 기록이 사실임을 요한복음 6장 10절에 있는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를 보고 알았다 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요한복음 6장 26절의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썩을 그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고, 오병이어의 기적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크게 과장하고 자랑해야 할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많은 무리들에게 배분해준 그 떡을 썩을 양식이라 했던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이 직접 이 일을 행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말인 것이다.
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을 먹였다 하는 기록이 조작되었다면 예수님의 저 말씀이 어떻게 기록될 수 있었겠는가?
오천 명을 먹였다는 사실, 다시 말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창조력으로 공급된 그 떡을 두고 썩을 떡이라 말했다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다 그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이 사건의 기록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었고, 예수님을 확실히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 썩을 떡이 아닌 영원히 먹을 수 있는 그 떡은 바로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한 일의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일일이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혹시 조작된 기록이 들어 있는지 아닌지를 철저하게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한 말씀과  기적을 기초로 예수님을 알 수밖에 없다.
그 외에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로 성경에 있다고 모두 사실이라고 보면 안된다.
복음서에는 여러 경로의 조작들이 많다.
가령 예수님의 족보를 보아도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의도가 분명한 조작된 족보를 가지고는 예수님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하신 일을 분석하여 그 기록의 진위여부를 스스로 입증하는 것 외에는 없다.
다시 말하거니와 예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증거를 포착하는 일 그것이 그 무엇보다 중하다 그것이다.
지금 기독교는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는데 있어 마땅한 해명과 증거를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가장 큰 죄를 범하는 일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예수께서 죽음을 택한 기록도 보면 사람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가지 않아도 될 예루살렘에 갔는가?
예루살렘으로 가면, 죽을 수도 있음을 예수님 자신이나 제자들 역시 충분히 예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자신은 왜 일부러 그곳으로 도도한 걸음을 옮겨갔을까?
예수님이 스스로 그런 죽음의 길을 택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래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은 후 이 땅위의 인간들에게 씨를 뿌리기 위한 준비 작업 즉 시찰(視察)을 하러 잠시 오신 것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왔기에 그 몸을 가진 채로는 자신의 본향인 저 하늘로 갈 수가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벗어 던지는 그 죽음의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 예루살렘에 갔던 것이다.
다음에는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누구나 죽으면 끝나지만 예수님은 본연의 자세로 다시 일어났다.
즉 부활한 것이다.
예수님 부활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인간들뿐만 아니라 그 배후의 이스라엘 민족신 눈에도 그가 한낱 인간에 불과했기에 그저 예수님을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알았다.
그들은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과연 자신의 생명을 던질 수도 있고 다시 쟁취할 수 있다고 하신 그 말씀대로 예수님은 다시 사셨고 현재도 살아 계신 것이다.



따라서 그가 지금 살아 계시기에 우리는 항상 그와 교통(交通)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항시 그 교통 가운데서 그 본질이 진리이며 빛이며 생명이신 예수께서 공급하는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라야  ‘나’ 라는 존재는 그와 연합되어 그처럼 죽지 않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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