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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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이라 하는 것은 일한 결과이지 불로소득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의 일한 결과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에 필요한 돈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물이라 한 것이다.
그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이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결과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무엇인가 남기는 것이 있는 사람, 다시 말하면 플러스(plus)가 있는 사람이 있고
둘째는 이 세상에 손해만 끼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마이너스(minus) 인생이 있다.
그리고 또 한 부류는 남는 것도, 손해도 주지 않는 제로(zero)인 인생이 있다.
그런고로 사람마다 자기 생활에 있어서 나는 이 세상에 와서 플러스의 생활을 했는가 혹은 하나님이나 세상에 마이너스를 끼쳤는가 반성을 해야 된다.
그런 반성이 없이 산다면 그것은 개나 돼지만도 못한 종류들이다.
무슨 일을 하던지 나는 이세상에서 이득만 보아야 되겠다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보고 예수님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최종의 심판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아무런 평가를 하는 분이 없는 줄 알아서는 안 된다.
평가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플러스 생활을 했다.
그러면 그 남는 것을 이 세상에 두지 말고 하늘에 저축하라 그런 말이다.
이 세상에 그런 플러스 부분을, 가치 있는 부분을 두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첫째는 도적들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도적질하는 세상이다.
둘째는 좀먹는 세상이다. 그래서 그 물건을 못 쓰게 만든다.
셋째는 자연적으로 녹이 슨다.
이세상은 값진 물건을 녹이 슬게 하는 곳이다.
여러분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대해 정리해 말하기를 도적의 세상이다.
그런데 사람만 도적질하는 것이 아니고 많은 神들도 도적질하고 있다.
다음에는 가만히 두어도 좀이 든다.
좀이 먹어서 쓸모 있는 물건을 못쓰게 만드는 것이다.
다음에는 녹이 슨다. 그래서 역시 못쓰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했다.
이 세상에 세가지 중대한 좋지 않은 현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복된 세상이다. 생명이 있는 세상이다. 열매가 있는 세상이다. 말씀하지 않고 이 세상은 도적의 세상, 가치 있는 물건을 좀이 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만드는 그런 곳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현 기독교도 그렇고 성경에도 그런 말이 쓰여 있지만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었다 하는 구절은 후에 삽입된 구절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도적들이 가득차 있고 좀먹고 녹이 스는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러면 하나님도 이와 같은 세상을 원하신다는 말이 된다.
여러분 기독교가 얼마나 미련하고 어처구니없는 종교단체인가를 인식해야 한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했다. 이 세상은 도적들의 세상, 좀 먹는 세상, 녹이 스는 세상, 그런고로 이와 같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때문에 세상에 온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온 근본 목적은 모른다.
또 그것을 사람에게 알릴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근본의 일부는 확실히 이 땅을 살피고 검증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다.
다른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 한가지는 도적의 세상, 좀이 드는 세상, 녹이 스는 세상을 확실히 살펴보기 위해서 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첩에 기록 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한 말씀은 내가 불을 내린다.
사랑하면 불을 내리겠는가?
그런데 한가지는 이 세상이 100% 도적들로 찼고, 녹이 슬고 좀이 먹는다면 벌써 이 땅덩어리는 없어졌다.
그런데 개중에 만분의 일, 천분의 일은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까지 같이 불 속에 넣어 없애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양 일백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한 마리가 길을 잃었고 그래서 그 한 마리를 어떻게 하던 찾으려고 끝까지 애를 쓰는 것 같이 이 땅에 하늘의 자녀가 소수일지라도 그 자녀들을 내버려 둘 수 없고, 또 그대로 불덩이로 함께 멸망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께서 그들을 건지려고 온 것이다.
그들을 건지기 위해 조그만 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면서 이 길로 나오라는 것이다.
그들을 건지기 위해 조그만 구멍을 뚫어 놓았다.
이 구멍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그 구멍을 빠져나오면 산다.
그 길, 그 구멍 바로 예수님이 만든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서 십자가의 도(道)라 한다. 십자가의 길이다.
그러나 그 길로 나오기 힘들다. 왜인가 바로 그 길이 좁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길의 이름을 십자가의 길이라 부른 것이다.
그 길을 우리들은 만들지 못한다.
예수께서만 그 길을 만들 수 있으며 또 만들었으며 그리고 우리보고 그 길로 나오라 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인간들이 가는 길로는 가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만든 좁은 길로 오라고 한 것이다.
그 묘한 이치를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평해서 도적들의 세상, 좀 먹는 세상, 녹이 스는 세상 그런고로 나는 이 땅에 평화를 줄려고 온 것이 아니고 불을 던지러 왔다 말씀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중 어린양 한 마리라도 그런 운명에 처해지는 것을 가만히 볼 수가 없다.
백 마리 중 한 마리라도 그냥 둘 수 없다는 것이 예수의 심정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온 것이다.
백 마리 중 한 마리라도 잊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건지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세상을 건지러 온 것이 아니다.
만일에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이 우주가운데 가장 비참한 생물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 세상을 탈피해 나갈 구멍이 없는 것이다. 길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온 목적 중의 하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 중대한 이유의 배후는 이 우주는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우주가 완성 되려면 이 지구가 우주에 비교할 때 하나의 먼지덩이 존재밖에 안되지만 이런 존재라도 불순한 존재로 있으면 이 우주는 완전한 것이 못 된다.
그런고로 한편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우주라는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온 것이다.
우주를 완벽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왔다.
그런 가운데 지구덩이 하나가 더러워 그것을 없애버린다. 제거해 버린다.
우주라 하는 완성품의 방해물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이 지구에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온 것이다. 최종의 길인 것이다.
이 지구에 오기 전에 우주전체를 답습해 본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여기에 온 것이다.
예수님이 오기 전에는 이 지구덩이에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의사가 여기에 도달 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만드신 법칙만 있었지 그 이상의 의사의 전달은 없었다.
최근에 어떤 학자는 주기도문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고 1세기후에 교회에서 조작한 말이다 하고 있고 장로교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며 싸움이 나고 있다.
여러분 주기도문에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옵소서 하는 말은 사람으로서는 그 말을 못한다.
예수님 외에는 그 말을 못한다.
그 말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이 땅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도 도달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께서 온 이후로 하나님의 의사가 비로서 이 땅에 통하게 된 것이다.
그 전에는 다른 神들이 무엇이라고 지껄였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전달 안된 것이다.
지금 기독교는 이 주기도문의 뜻도 의미도 제대로 모르면서 예수께서 한 말이다 아니다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 검증을 해 보아야 한다.
이 땅은 도적들의 세상인데 검증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이 하지 않는 말도 했다고 이 성경책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주기도문에도 마지막 부분은 변조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가운데 오늘 말씀한대로 예수님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그 골자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오늘 하신 말씀은 가치 있는 물건을 땅에 두지 말아라.
그 말은 가치 있는 물건을 낼 수 있는 사람을 향해서 한 말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소질이 있는 사람 이 사람들이 가치 있는 물건을 낼 수 있고 그러면 그 물건은 땅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이 땅은 이제 멸망시킬 땅이니까 두지 말아라.
도적의 세상이고 녹이 슬고 좀먹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두지 말아라 경고해 주는 것이다.
보물이란 가치 있는 물건이다. 우리 신자들에 있어서는 가치 있는 일인 것이다.
아무 일도 안 하면 우리는 가치 있는 물건을 만들 수 없다.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 나는 무엇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는가 반성해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예수님을 위해 나는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다면 이제 나머지 인생이라도 일을 해야 한다.
낮이 12시간인데 지금까지 11시간동안 아무것도 안 했다.
그러나 마지막 한 시간이 남아 있는데 이 시간이라도 일하면 그 결과가 있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포도나무와 그 가지는 한 생명체가 아닌가? 그렇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는 하나의 생명체이다.
우리가 예수님이라 하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한 지체라 할진대 열매가 생기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라 하는 큰 생명체 안에 있다 하면 자연적으로 영양분을 받아서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지가 말라 죽었다 하면 모르지만 살아있다면 예수님으로부터 영양분을 받아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러면 그 열매는 땅에 두지 말고 하늘에 저축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하늘은 내가 갈 곳이고 내가 살 곳이며 영원히 거주할 곳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다. 또 한편으로 말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멍에를 메었다.
그 멍에는 무게가 큰 쪽에는 예수께서 맡고 우리는 능히 멜 수 있는 무게만 가지면 된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멍에는 가벼우니라 한 것이다.
물건이 아무리 커도 멜 수 있는 중량만큼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은 멍에를 메고 우리는 걸어가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나는 믿는다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말아라. 우리는 일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중얼거리는 기도소리나 듣고 있는 분은 아니시다.
기도라 하는 것은 단 일초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도달할 수 있는 기도를 해야 한다.
일은 의식적으로 되는 일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되는 일도 있다.
지난주의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 하는 것이 바로 무의식적인 일이다.
예수님과 같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열매가 맺어져 하늘나라에 저장되게 되는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