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오늘 본문에 보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가 감추어지고, 어린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드러난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언뜻 봐도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이다.
천국의 이치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더욱 드러내서 알게 해야 이치에 맞는 것인데 그것을 오히려 감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린아이에게 무슨 천국의 진리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인가.
그들은 상대적으로 더 깨달을 수도 알 수도 없는 존재가 아닌가?
보통 생각할 때 오늘 이 말씀은 예수께서 그의 진리를 가르침에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을 더욱 동정 혹은 선호한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마 그때 제자들도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알아듣지 못했으리라 짐작된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10장 21-22절에도 꼭 같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때뿐만 아니라 지금의 기독교도 이 말씀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다고 나는 본다.
예수님은 어째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이치를 감춘다는 것인가. 이상한 것이다.
도적질 같은 나쁜 것이라면 모르되, 그것이 천국의 이치라면 당연히 먼저 그런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본문에서 지혜롭다는 말의 원어는 소포스(σοφός)인데, ‘교묘한, 지혜로운, 현명한’의 뜻이 있다. 그리고 슬기롭다는 말의 원어는 쉬네토스(συνετός)인데 총명하다는 뜻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당시 지적한 지식이 있고 총명한 사람들은 누구이겠는가?
또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의 지식이라면 무엇이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그 지식이라는 것은 바로 구약의 기록을 아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구약성경은 일종의 문학서와 윤리서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율법서와 예언서가 핵심을 이루는 문서이다.
따라서 당시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이라 하면 바로 바로 구약성경의 핵심을 이루는 율법서와 예언서를 연구하여 통달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계층의 사람들을 말한다.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제사장과 장로 등의 그룹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 구약성경의 기록에 대해 잘 아는 지식이 있어야 사본으로 기록한다거나 혹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해석해 줄 수 있는 권위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그들도 구약성경을 기록하는데 있어 종종 착오로 인해 오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 날 까지 구약성경의 여러 사본들이 발굴되었지만, 그 사본들의 기록들을 자세히 살펴서 비교해 보면 서로 다르게 되어 있는 곳이 대단히 많다.
어느 것이 원본에 정확히 일치하는 기록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현재 개신교의 구약은 유대교가 경전으로 사용하는 사본인 주후 10세기 경의 마소라 사본(masoretic text)을 그대로 받아들여 쓰고 있다.
유대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글자 한 자에 점이 있고 없음에 따라 그 뜻이 크게 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구약의 사본을 기록하는 서기관들이 대단히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원본과 다르게 기록하는 경우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면 구약을 기록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구약 성경을 잘 안다 해서 학자 혹은 선생의 대접을 받았지만 그들은 전혀 예수님을바로 깨달을 수 없었음을 우리는 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비록 지혜로고 슬기롭다 하는 부류였지만 그들이 가진 지식이라는 것은 결국 구약성경에 관한 것 밖에 없다 그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그 지식으로 인해 예수님을 바로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소위 지식이 있고 머리가 명철하다는 사람에게는 천국의 이치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인 것이다.
이는 명백히 구약의 말과 내 말은 다르다는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천국의 이치를 말해줘 보아야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격이다 그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의 저 기록들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자 연구하는 사람들이 과연 예수님을 바로 깨달을 수 있을까?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단언한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구약에 관한 지식이 세상 모든 학문의 정점 혹은 핵심이라 여겼지만 그것으로 예수님을 바로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가진 그 지식이 스스로 진리를 향한 문을 닫은 것이다.
예수님이 닫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말을 알고 깨달을 수 있었는가?
분명히 말하기를 어린 아이라는 것이다.
이 어린아이란 무엇인가?
원어로 보면, 네피오스(νήπιος)인데, 젖 먹을 정도의 어린 아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절대로 내 말 곧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말했다.
내 살과 내 피가 무슨 말인가?
젖이란 말이다.
바로 갓난아이가 반드시 먹어야 하는 어머니의 젖과 같은 것이다.
이 젖은 누구로부터 나오는가 하면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 가는 동안 예수님이 공급해 주는 젖을 먹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기 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어린 아이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젖을 먹는 사람들 그들은 내 젖을 먹고 그 다음에는 내게서 배워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배워서만도 안 된다. 다음에는 예수님의 생활을 체험해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멘 멍에를 예수님과 함께 메는 일이다.
그리고 그 멍에가 내게만 매여 있다면 우리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함께 멍에를 맴으로 가벼워져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 멍에의 무게를 조절해 주는 것이다.
내가 질수 있을 정도의 멍에를 안겨주는 것이다.
우리 목의 멍에를 조절해서 가깝게도 하고 멀게도 하여 나의 멍에를 내가 질수 있을 만큼의 멍에를 지워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네 멍에는 가벼우니라 하는 말이 그 말인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일을 많이 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한테는 멍에가 조금 무겁게 될 수 있도록 거리를 늘릴 것이고, 또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그 짐을 예수께서 더 질 수 있도록 그 거리를 가깝게 해 줄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내가 질수 있을 정도의 무게를 언제나 지워 주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십자가를 짊어 져서 무거울 때는 그 멍에의 거리를 조절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서는 언제나 가벼운 멍에가 된다 그런 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 예수께서 해주신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를 깨달을 수 있으려면 첫째는 젖을 먹어야 한다.
예수님이 공급해주는 젖을 먹어야 하고 둘째는 예수님이 가르치는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에게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우는 지식으로는 아무리 가 보아야 그것으로 예수님을 깨달을 수 없다.
셋째는 예수님을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멍에를 같이 메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멍에는 내게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그 멍에는 내 정도와 내 능력에 따라 조정되어 내가 질 수 있을 만큼 지게 해 준다.
따라서 그 멍에는 언제나 가볍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이치를 안다. 떠들어 보아야 내 생활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어보지 않으면 예수님을 깨달을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