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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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 앞에 그 아들을 데리고 와서 당신의 나라에서 하나는 우편에 다른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 아들 하나는 주의 나라에서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예수께 간청한 것으로 교회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사건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얼마 전에 일어난 일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활동 초창기가 아니고 땅 위에서의 생활을 거의 마칠 무렵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가 자기 어머니를 시켜 그런 말을 하게 했다 하는 자체도 우스운 것이고 납득이 안 되는 일인 것이다.
또한 아들들이 예수께 말을 했다면 모르지만 어머니가 가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이상한 것이다.
또 요한과 야고보 두형제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예수님의 전통적인 교훈을 잘 깨달았다.
기록이 남아있는 4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은 사람은 요한 뿐인 것을 알 수 있다.
세 복음서는 예수님의 핵심사건이 아닌 것이 주로 기록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그와 같은 표면적인 것과 함께 핵심적인 것을 다룬 것이다.
따라서 요한이 자기어머니를 시켜 예수께 말하게 했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는데 있어서 그 핵심에 접촉할 수 있었던 사람은 요한과 야고보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이 두형제 뿐 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 제자는 가정에서 항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예수님의 정신에 대하여 예수님의 복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부분을 깨닫는 것은 다른 제자들보다 나았다.
나머지 열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에 온 메시아인줄로만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핵심문제를 전혀 접촉하지 못하고 또 깨달을 수도 없는 그런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고로 이 요한과 야고보 두 제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접촉되어 깨닫는 것이 높다 하는 것에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본문 중에 “나라”라는 말의 원어는 “바실레이아,( βασιλεία)”로서 '왕국, 왕토, 통치, 왕권'의 뜻으로 여기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뜻하며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혹은 통솔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뜻할 수 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이 두 제자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회에서 좌우에 가까이 있어야만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접촉해서 깨달을 수 있다고 그렇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런고로 오늘날 교회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천국에서 하나는 주의 좌측에 하나는 우측에 있게 되는 어리석은 요구를 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있지만 열두 제자 모두 예수님을 깊이 접촉할 수가 없는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 자체도 그랬고 야고보도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가장 가깝게 하나는 우편에 앉고 하나는 좌편에 앉아서 가까이에서 그 말씀을 완전히 포착하고 파악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간단히 경박하게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이와 같은 것을 언제나 늘 표면적인 간단한 생각을 가지고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예수님 공중생활의 초창기라면 모르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얼마 전 일이고 또 제자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사람 즉 예수께서 나중에는 십자가위에서 요한에게 자기 어머니를 부탁했다.
이제부터 네 어머니이니까 네 집에 모셔라 하였고 자기 어머니를 보고 여인이여 이제부터는 요한의 집에 가 있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야만 구원의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형제가 적어도 4명의 남동생과 두명 정도의 여동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말하자면 마리아의 뱃속에서 난 네 아들과 두 딸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어머니에게 명령해서 요한의 집에 가 있도록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자기어머니에 대한 구원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주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기 동생 야곱이라던지 여동생들이 있었지만 당신은 이제부터 내 제자 요한의 집에 가 있으라 말하였고 또한 마리아는 그 말에 순종하여 그날부터 요한의 집에 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열두 제자 중 가장 탁월한 사람 예수님의 말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나중에 천국에 가서 주의 좌측에 우측에 앉게 해달라는 그와 같은 유치한 요구를 했다고 생각되지 않은 것이다.
단지 예수님이 있는 사회에서 두 제자가 가장 가까이 예수님의 옆에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깊이, 완벽하게 포착할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 속에서 부탁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그 말을 고맙게 받아들인 것 같다.
언짢게 받아들인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구하는 법, 요구하는 법을 아직도 잘 모르는 구나 하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는가 하고 물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 잔은 요한 18:11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에서 의 그 잔으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며 생명의 잔이다.
여기서 잔은 원어로 “포테리온 ποτήριον “으로 히브리어 “코스”의 역어로 사용되었고 운명을 뜻한다.
내 운명과 같은 것을 너희도 가질 수 있느냐 하신 것이다.
여기서 두 제자는 가능하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대로 수행하겠다고 결의를 가졌던 것이다.
이 두 제자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께서 마시는 잔을 능히 마시겠습니다. 또 마실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마실 가치가 있습니다. 마실 희망, 그런 소망을 갖고 있다고 한 것이다.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예수께서의 대답은 그것이 옳다. 그래야 한다 하시면서 그러나 내 좌우 옆에 함께 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정한대로 하신다 한 것이다.
이 말씀이 지금까지 2천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좌우 옆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듣고, 해석하며 그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의 위치라면 예수님 마음대로 택할 수 있는 것이다.
나와 운명을 같이 하고 내 말을 그대로 깨닫고, 내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며 내 목적을 끝까지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우편에 앉고 좌편에 앉아서 이것을 수행해야 된다고 예수님 자신이 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상식적으로 세상사람들의 개념으로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내 좌편에 앉거나 내 우편에 앉게 하는 것은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회, 천국사회에서는 특권층이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2천년의 긴 역사를 가지면서도 이 말 한마디 제대로 깨닫지를 못한 것이다.
예수님의 좌우 옆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을 예수님 자신이 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 아버지가 택한다 하신 것이다.
아버지가 택한다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
그것은 천국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그 일에 적당하게 거기에 맞는 능력, 거기에 맞는 힘, 역사, 모든 일, 모든 것이 천국에 적합한 능력과 자격의 소유자가 좌우 측에 앉을 그 자리를 원리,원칙대로 설정해 놓았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누구인가?
진리이고 원칙인 것이다.
내 옆에 앉고, 내 좌편에 앉은 것은 원칙 밑에서 정해진다는 것이다.
어떤 특수한 존재나 특권을 가진 존재가 지명한다 하는 것은 천국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베드로가 천국 열쇠를 가졌다 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인 것이다.
그와 같은 말을 예수님이 하였다고 믿는 종교단체가 지금까지 많은 대중을 혼탁하게 만들고 속여온 것이다.
그런고로 천국이라 하는 세계는 원리, 원칙, 진리 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특권층, 특정존재 등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성경만을 보면 마태복음 16장에서는 특정인 즉 베드로가 천국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기록해 놓고 오늘 여기 몇장뒤 즉 마태복음 20장에서는 내 좌우 옆에 앉게 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된다.
다시 말하면 원리 원칙 밑에서만 된다는 말이 있어도 어떤 신학자나 목사들조차도 이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올바로 밝혀주지 못한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고 생각하지도 않고 이 단체 저 단체나 만들어 나누고 하면서 이 세상 돌아 다니는 神들의 종 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마시는 잔은 무엇을 말하는가?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의 운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 운명이라 하면 말은 간단하지만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는 미련한 원수의 행동이 이 잔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모르는 원수의 장난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것은 내가 늘 하는 이야기 이지만 사람은 아닌 것이다.
神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그 神이 예수님을 몰랐던 것이다.
예수께서 인간으로 온다는 사실을 안 神들은 예수님을 농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사람으로 왔기 때문에 자기들 마음대로 농락을 하던가 그것이 안되면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죽이면 끝난다고 본 것이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다시 일어 나실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인간은 죽은 다음에 일어나지 못한다.
인간이 죽은 다음에 부활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인 것이다.
인간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 국가들에 가졌던 부활사상 특히 애굽 종교의 핵심은 부활인데 그들은 무덤 속에도 도서관을 만들 정도였다.
죽어서도 공부한다는 것이다.
이런 부활사상은 神들이 인간들을 농락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神들은 예수님이 인간으로 왔기 때문에 죽이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으로 안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일어설 그 사실, 그 이치를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잔이라 하는 것은 무지한 神들의 장난이 들어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한대로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들이 마실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이 잔은 나의 십자가이며 멍에다.
따라서 너희들도 이 세상의 무지한 神들의 농락에 의해 너희도 내가 진 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니 너희가 이 십자가를 질 수 있겠느냐? 의 뜻이다.
그때마다 너희들은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 보기에는 이세상의 많은 인간들이 무지한 神들의 농락의 잔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인 것이다.
둘째로는 예수께서 마시는 잔 가운데 약한 자를 멸시하는 것이 들어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왔기 때문에 가장 약한 자로 본 것이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하는 말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고백을 한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의 초라한 모습도 상상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죽인 神들은 예수님을 가장 형편없는 약자중의 약자로 본 것이다.
이세상은 순수하게 깨끗하게 지내려고 하면 사람을 약자로 보고 때려 잡으려고 하는 더러운 곳이다.
돈이 천원 있으면 백원 있는 사람을 무시하고 한치 높은 권리를 가지고 있으면 한치 밑에 있는 사람을 억누르려고 하는 그런 더러운 세상인 것이다.
그런고로 이 잔이라 하는 것은 약자를 내려보고 죽이려고 하는 더러운 요소가 들어있다.
너희는 그것을 감당해야 된다고 한 것이다.
다음에 세 번째는 순수하고 순진한 사람에 대한 횡포인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깨끗하고 순수한 사람에 대한 횡포인 것이다.
예수께서 마시는 잔 가운데 바로 그와 같은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잔을 마시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이세상에서 참다운 원리, 원칙, 진리를 따라 가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저와 같은 횡포의 대상이 우리 눈앞에 언제든지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감당 할 수 있는가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네 번째는 이런 횡포에 대하여 너희는 감히 일어나서 죽지 말고 싸워야 한다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정의로 싸워야 한다. 진리로 싸워야 되는 것이다.
잔을 마신다 하는 것이 무장을 한다. 정의의 전투 태세에 들어간다 하는 것이다.
어리석고 약자를 멸시하는 사회 순수한 사람에 대한 횡포의 사회에서 격투를 접촉해 왔을 때 나는 정의를 위해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 피하지 말고 나가 싸워야 한다. 그런 말이다.
이잔 가운데 그와 같은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투 할 때는 이기는 것이 목적이다.
싸움에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질 싸움은 하지 않는 것이다. 이길 싸움을 해야 된다. 이길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승리를 목표로 끝까지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다.
이 잔 가운데 승리의 요소가 들어가 있다.
진리로 싸워서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리석고 미련한 것들이 언제 내게 닥칠지 모르지만 우리는 언제나 마지막에는 싸울 각오를 해야 한다.
이 잔이라 하는 것은 최종의 승리의 잔을 말한다.
이길 방법을 강구 해야 되는 것이다.
승리의 전투, 승리의 잔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마시는 이 잔이 승리의 잔이다.
실패의 잔을 마셔서는 안 된다 하신 것이다.
누가 승리하는가? 내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내가 승리하는 것은 예수님이 승리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승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승리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 또 하나는 우리의 머리가 나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지혜가 있어야 한다.
바른 생각 명철한 생각을 가지고 싸워 나아가야 되는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P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