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0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0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0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0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0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0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0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0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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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풍병자의 이야기가 마태복음 9장 1-8절까지에도 있고 누가복음 5장18-26절에도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의 기록은 마가복음의 기록보다 정확치 않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의 한 집에 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문으로 병든 자를 들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왔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소자여’ 그런 말이 있는데 "어린아이여"라는 뜻이다.
그런데 네 사람이 메고 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어른이다. 어린아이가 아닌 것이다.
또 어린아이라면 한 사람이 업고 올 수도 있지만 어른은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아니고 어른이기 때문에 네 사람이 메고 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어린아이여’라고 말한 것이다.
대단히 중대한 말이다.
이 말의 의미를 기독교역사 이 천년이 지났는데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왜 어린아이라고 말했을까?
오늘 여기서 "소자여"는 원어로는 ‘테크논’( τέκνον, )이란 말인데 ’어린아이’란 뜻이고 이 말은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에만 있다.
마태복음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은데 마태는 그 의미를 몰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네 사람이 메고 와야 될 정도의 어른인데 왜 어린아이라고 했을까? 까닭이 있다.
여기에서 이 사람들이 문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까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헐고 그 환자를 예수 앞에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여러분 유대나라 지붕은 우리나라 지붕을 허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힘들다.
그 힘든 일을 한 사람들한테 예수님께서 ‘소자여’ 한 것이 아니고 그 환자에게 ‘소자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오늘 성경에는 그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말했다 했지만 예수께서 병 고치기전에 하신 말씀은 그 환자, 중풍환자에게 한 말인 것이다.
기록에 보면 남의 집에 올라가 그 집 지붕을 헐고 환자를 내려놓았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네 사람의 의견이 아니다.
그 환자가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 부대상황이 따른다.
성경에는 기록이 없으나 남의 집을 헐었다면 그 집을 배상해야 할 것이고 또 남의 집을 못쓰게 했음으로 도덕적, 사회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
누구의 허락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남의 지붕까지 올라가 지붕을 뜯고 내려놓으라 한 것은 이 중풍병자의 뜻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중에 모든 책임을 내가 질 터이니 이 지붕을 헐고 예수 앞에 나를 내려놓아달라 이렇게 부탁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죽기 살기로 큰 결단을 하며 나를 예수님 앞에 놓아 달라 하는 결심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런 잘못을 책망하시지 않았다.
이 ‘소자여’, ‘어린아이여’라고 말씀했다.
그러면서 네 죄를 사해준다.
우리 성경에 그렇게 쓰여있는데 내가 이전에도 몇 번 이야기했지만 본문에서의 이 단어는 다른 의미로 쓰여졌다.
본문에서는 ‘너의 죄를 없애 버리다’의 뜻이다.
다시 말하면 죄를 없앤다 하는 것은 병을 고친다는 말이다.
병을 고친다는 말은 병을 없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원어의 ‘아피에미’(ἀφίημι)란 동사인데 문자적인 뜻으로 ‘보내버리다, 탕감하다, 버리다, 없애다, ‘용서하다’의 뜻이 있는데 본문에서의 뜻은 ‘없애 버리다’의 뜻이다.
이것은 죄라 하는 것은 영적병을 가리키며 이 영적 병을 고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능력이 있음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고 또 보여준 것이다.
구약의 ‘마카’라는 말도 죄를 용서한다는 말이 아니고 죄를 없앤다는 말이다.
이것이 죄를 사한다, 용서한다는 말로 쓰게 된 것은 사도 바울이 처음이다.
바울이 자기 학설을 세우기 위해 ‘죄를 사한다’라는 말로 써왔던 것이다.
‘죄를 사한다’라는 말을 에베소서4장에 ‘카리조마이’ (χαρίζομαι) 이 동사의 뜻은 ‘탕감하다’, 거져준다, 죄를 사한다의 뜻이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마카’라는 말은 사도바울의 말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사도바울의 정신을 받들어 영어의 ‘forgive'라는 말로 쓰고 있는데 터무니 없는 말인 것이다.
기독교가 사도바울의 말에 감염되어 성경을 바울의 뜻대로 고치고 하는 수단을 써왔던 것이다.
믿음이란 말은 바울이 만들어낸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모든 죄를 믿음으로 용서받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란 본질적으로는 어떤 종류를 변경시킬 수 없다.
믿음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종자를, 종류를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멸망 받을 사람을 구원받을 사람으로 변경 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믿음이 좋다 하더라도 사람이 개가 되고 개가 사람이 되거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믿음의 효과란 같은 종류의 정도 차를 가져다 주는 효과 정도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즉 심리작용이다.
내가 믿고 있다하면 내 몸속의 혈액순환이 달라지고 면역기능도 달라진다.
이런 경우 몸에 병이 있는 것도 나아질 수 있고 또 정신적으로도 안정이 올 수 있다.
이것은 심리작용이지 근본적으로 무슨 죄가 없어지거나 병이 고쳐지거나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내가 오래전에 읽은 책인데 일본의 한 의사가 쓴 책이다.
그 책 속에 내용 중 어떤 암환자의 수술을 하게 되었고 그런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해 그대로 다시 덮어 놓고는 환자를 보고 수술이 완벽하게 잘되었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 의사가 예측하기로는 한달정도 밖에 못살 것으로 본 것이다.
의사는 수술 후 그 일을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10년 후 우연히 어느 선착장에서 그 환자를 만난 것이다.
그런데 그 환자는 깨끗이 나아 있었다.
환자가 의사를 보고하는 말이 선생님께서 너무 수술을 잘해 주어서 이렇게 건강합니다 하더라는 것이다.
의사는 놀랬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해서 책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의사가 환자에게 수술이 완벽하게 되었다는 위로의 말에 정신적 안위를 찾았고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의사의 거짓말에 오히려 환자는 정신적 안정을 찾고 암까지 낮게 되었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즈음 믿음으로 병이 나았다는 것도 이러한 일종의 심리작용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병을 낮게 한다 해도 다리가 없던 사람이 다리가 생기고 팔이 없던 사람이 팔이 생기거나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단 한가지 믿음이 좋으면 머리가 아픈 사람이 머리가 맑아지고 배가 아픈 사람이 낮거나 정도의 심리작용으로 오는 질병의 회복 정도이다.
그러나 모든 병이 근본적으로 믿음으로 고쳐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서 하신 말씀은 근본적으로 병을 고쳐준다는 것이다.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예수님 외에는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다른 神들은 불가능하고 예수님만이 가능한 일인 것이다.
예수께서 병을 고쳐준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을 보고 고쳐준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믿음을 보고 장하다라고 말을 했지만 병을 고쳐준 것은 믿음을 보고 한 것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을 예수께서 눈을 뜨게 했는데 그 사람에게 믿음이 있어서 고쳐준 것이 아니다.
또 38년된 병자를 보고 일어나 걸으라 명령했을 때에도 그 사람의 믿음이 좋아서 그렇게 고쳐준 것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눈이 없던 사람을 눈이 있게 해준 것이나 38년동안 누워지낸 사람을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걷게 한 것은 예수님 외에는 안되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네 죄를 없애 버린다. ‘아피에미’ 그렇게 말했을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런 되지 못한 인간이 어디 있는가라며 항의를 한 근거가 어디 있는가 하면 구약 이사야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사야 43장 25절에 보면 여호와만이 죄를 없애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오직 여호와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인데 이사야서에서 그렇게 못박고 있는데 어떻게 예수께서 여호와 밖에 할 수 없는 죄를 없앤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항의하고 힐난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실증을 보여준 것이다.
‘일어나 걸으라’ 말씀하시니 그 사람이 당장 일어나 걸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어느 말이 쉽겠는가?
죄를 없애버린다는 말과 일어나 걸으라는 말 중 어느 쪽이 힘 드는가? 힘든 말부터 내가 해주지 않는가? 그런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 일어나 걸어라 명령했고 그 환자는 일어나 걸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여호와 밖에 할 수 없는 능력을 예수님이 당장 보여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는 그런 능력이 없다.
예수님만이 그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이사야에서는 여호와만이 죄를 없앨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여호와는 그럴 능력이 없다.
예수님만이 그런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오늘 이 성경구절 하나만 가지고도 깊은 진리를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여기서 하나는 이 세상에 병고치는 것은 그렇게 문제가 안된다.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 떡 다섯덩이로 오 천명을 먹인 일이나 눈이 없던 사람에게 눈을 만들어 넣어준 일이나 오직 예수님만이 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거기에 앉은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었더니 머리속에 옛날 여호와의 말로 꽉 찬 유대인들에게 이것이 도무지 납득이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호와 밖에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 자기가 한다고 하므로 힐난을 퍼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들의 믿음이란 것에 대해 인식을 바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오늘 여기서 이 중풍병자는 남의 지붕을 헐고 예수님 앞에 내려놓으라는 주문을 할 정도로 예수님을 꼭 만나 보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병 고침도 있지만 예수님을 인식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보통으로는 포기하고 다음으로 미루었을 텐데 남의 집 지붕을 뚫고라도 들어갈 생각을 한 것인데 그것은 보통 각오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예수께서 이 사람을 보고 ‘이 소자여’ 말씀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어린아이여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사람이 ‘어린아이’라는 말이다.
어린아이라는 말씀을 예수께서 다른 여러 설교에서도 말씀했지만 너희는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 말씀한 것과 같은 뜻인 것이다.
즉 이 중풍병자는 영생의 자손임을 암시해 주신 것이다.
그 속에 씨가 움튼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는 양식을 먹고 사는, 예수님의 젖을 먹고 사는 어린아이임을 말해준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 자연인으로는 아무리 훌륭해도,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자연인 자체로는 영생의 세계에 못 간다.
씨가 움튼 사람, 소자 어린아이 원어로 ‘테크논’ 인 사람만이 저 세계에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예수님을 인식해야 한다.
이 세상의 법, 윤리는 문제가 안된다.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다가오는 어떠한 어려움도 뚫고 나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윤리도 문제가 아니고 정치도 문제가 아니다. 돈도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것이 문제가 될 수 없다.
어떤 예수님을 따르겠다던 제자가 자기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고 오겠습니다 했을 때 안된다 말한 것이다.
윤리를 초월하라는 말인 것이다.
어떤 부자가 예수께 어떻게 하면 영생하는가? 질문 했을 때 ‘돈을 다 버리라’ 말씀 하셨는데 이 세상의 부를 초월하라는 뜻인 것이다.
예수님을 발견하는데 이 세상의 어떤 장애물도 배격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여기서 남의 집 꼭대기에서 지붕을 헐고 내려온다는 것도 남의 재산을 파괴하는 일로 이 세상의 도덕적, 법적, 윤리적으로 허용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는 윤리, 법, 이 세상의 규례 그것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걸고 찾아야 한다.
십자가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 세상의 윤리, 법, 정치에 부딪칠 때 내게 십자가가 오는 것이다.
그런 십자가가 문제가 안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초월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세계는 자유의 세계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이세상의 법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
이 세상의 법, 정치, 윤리 이 모든 것을 초월해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오늘 이 사람이 남의 지붕을 헐고서라도 예수님 앞에 나가야 되겠다.
자기의 병도 병이지만 내 자신이 예수님 앞에 한번 나가 보아야 되겠다.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보아야 되겠다는 각오로 예수님 앞에 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는 씨가 움튼 사람이다라는 뜻에서, 내 젖을 먹고 살 수 있는 인간으로 선포해 준 것이다. 소자여
백천(白泉) 김준식
(P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