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
마태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마지막 운명하실 때의 모습은 마가복음15장 33절에서 41절, 누가복음 23장 41절에서 49절, 요한복음 19장 28절에서 37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신이여 나의 신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될 마지막 무렵에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슈바이처박사는 예수님도 인간인 까닭에 마지막에 괴로울 때 그 괴로움을 면하기 위해서 기도를 이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면 신이 자기를 풀어주던지 아니면 하늘로 올리든가 해야 할 것인데 왜 이대로 두는가? 원망스럽다하여 그런 안타까운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나의 신이여'에서 ‘나’라는 것은 관용어로 히브리말의 관용어에 ‘나’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으며, 여기서 신은 하나님을 뜻합니다.
다시 번역하면 “하나님 하나님 나를 어찌하여 버리십니까?”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내용은 같고,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달리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제3시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제 6시에는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으며, 제 9시에는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소리 지르고 잠시 후에 운명하신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마태복음에는 ‘엘리 엘리’이고 마가복음에는 ‘엘로이 엘로이’로 되어 있는데, ‘엘리’는 히브리어이고 ‘엘로이’는 아람어로써 서로 뜻은 같으나 발음이 다릅니다.
'라마'는 왜, 어찌하여’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히브리어 ‘사박다니’인데 이 말을 헬라어로는 버리다는 뜻의 ‘엥카탈레이포’로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의 예수님의 모습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대단히 엄숙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심히 유치한 원망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운명 전 예수님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였고, 요한복음에는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기록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내 신이여 내 신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 말씀이 틀림없는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는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는 그 순간에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면 우리는 예수님 믿는 것을 당장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에 예수님의 죽음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께서 ‘엘리 엘리’라고 했을 때 그가 엘리야를 부른다고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봐서 예수께서 크게 말씀하셨다고는 하나 제 3시에 십자가에 달린 후 6시간이 지난 제 9시에 그의 말씀이 똑똑했을 리 없고, 또 올바르게 듣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누가와 요한은 이 말씀을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로만 생각하여 이 말을 빼버리고 예수님의 엄숙하고 장엄한 마지막 말씀, “내 영혼을 당신에게 바치나이다.” 혹은 “다 이루었다.”라는 말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 말 때문에 저는 예수님을 버려야하나 하고 고민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행동에서 조그마한 흠집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라고 여러 번 말해놓고는 막상 마지막 장면에 가서는 “내 신이여 내 신이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나약하고 원망스러운 말을 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틀림없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바로 듣지 못했다고 확신합니다.
‘엘로이 엘로이’라 한 것을 ‘엘리야’라고 들을 정도라면 ‘라마 사박다니’도 어딘가 착오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말했을만한 히브리어를 조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SABACHTHANI와 발음이 비슷하게 나올 수 있는 단어들을 살펴보면
1) 때린다, 배척한다, 울린다, 밀어낸다, 토해버린다, 함정에 떨어뜨린다, 뒤에 떨쳐둔다.
2) 때린다, 조롱한다, 멸시한다, 결판내다.
3) 혼합한다, 말아버린다, 덮어버리다, 내버리다.
4) 유혈한다, 떨쳐버린다, 흘려버린다, 음란한 것으로 여기다.
5) jb'v(7623,shabach) 찬양하다, 자랑하다, 어루만져주다, 칭찬하다, 안위하다, [명]영광, 영예
6) jb'v](7624,shebach) 아람어, 히브리어 jb'v(7623,shabach)에 해당한다.
7) qb'v](7662, shebaq, 셰바크) 아람어, 남겨두다, 내버려두다. 등이 있습니다.
위의 말들은 글자에 있어서 한자 내지 두자정도 틀리고, 발음도 ‘사박다니’와 비슷합니다.
‘사박다니’에서 다니는 과거를 말하는 것이고, ‘니’는 나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하실 수 있는 말씀은 5) jb'v(7623,shabach)로, 여기에 다니를 붙이면 ‘SHABACHTHANI’가 되는 것입니다.
헬라어 신약성경 sabacqaniv(4518,사박다니)의 바른 표기는 'SABACHTHANI'(sabacqaniv,4518)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신 히브리어 음성과 거의 일치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히브리어 음성대로 번역하면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영광되게(찬양) 하십니까!”가 됩니다.
그런데 sabacqaniv(4518,사박다니)는 셰박타니('내버려두다'라는 아람어 7) qb'v] 7662, shebaq, 셰바크에서 유래)의 음역이며 '당신이 나를 버렸다'를 의미한다고 신학자들은 주장합니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신 본래 음성은 “엘리 엘리 라마 셰박타니”인데 신약에서 헬라어로 표기할 때 “엘리 엘리 라마
sabacqaniv(4518,사박다니)”로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의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셰박타니의 정확한 발음은 SHEBAQTHANI가 됩니다.
여기에 대응하는 아람어로는 6) jb'v](7624,shebach)를 들 수 있는데 히브리어의 jb'v(7623,shabach)와 뜻이 같으며, SHEBACHTHANI로 발음됩니다.
이의 뜻은 5)와 똑같이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영광되게(찬양)하십니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하신 음성은 1) 히브리어로 ‘영광’, ‘찬송’을 뜻‘하는 'SHABACHTHANI', 2)아람어로 ‘버리다’를 뜻하는 ‘SHEBAQTHANI’, 3) 아람어로 ‘영광', '찬송'을 뜻하는 ‘SHEBACHTHANI’ 중 하나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헬라어로 표기한
sabacqaniv(4518, 'SABACHTHANI')와 대조해 보면 1)의 'SHABACHTHANI' 발음과는 거의 일치하고, 그 다음으로 3)의 ‘SHEBACHTHANI’가 비슷하며, 2)의 ‘SHEBAQTHANI’ 발음과는 가장 다릅니다.
예수님의 속성과 비교해 보더라도 1)과 3)은 일치하지만 2)와는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린다거나 예수님이 하나님께 왜 버렸냐고 원망의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임무를 완수한 예수님에게 아버지로부터 “네가 훌륭하다. 고생했으니 내가 어루만져 주마”하신 말씀에 대해 “엘리 엘리 라마 SHABACHTHANI”, 혹은 “엘리 엘리 라마 SHEBACHTHANI”, 즉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이토록 영광스럽게 하십니까!”라고 하신 후 “다 이루었다”하시고 본연의 세계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임무를 완수했다는 것으로 승리자의 모습이며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패배자의 모습하고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영광, 찬양을 뜻하는 히브리어
5) jb'v(7623,shabach)의 음역에 따라 신약성경에 헬라어 sabacqaniv(4518,'SABACHTHANI')로 표기하였으면서도 이의 뜻은 ‘버리다’, ‘포기하다’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 qb'v](7662, shebaq, 셰바크)의 뜻을 인용하여 ejgkataleivpw(1459, 엥카탈레이포)로 기록되어버린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음성은 'SHABACHTHANI'로 기록하였으면서 뜻은 ‘SHEBAQTHANI’를 취한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SHABACHTHANI” 혹은 “엘리 엘리 라마 SHEBACHTHANI” 즉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십니까!”라고 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엘리 엘리 라마 ‘SHEBAQTHANI”,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로 사람들이 믿도록 교회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늘이 버린 예수님을, 왜 나를 버리느냐고 하나님께 원망하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버린 자식을 우리가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참뜻을 우리가 바르게 이해해야합니다.
예수님의 참 모습을 증거 해야 할 우리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왜곡한다면 우리에게는 멸망의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신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알기 위함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 앞에서 드렸던 최종의 기도입니다.
때가 이르렀다 함은 십자가에 달릴 시간이 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맥락을 살펴보면 십자가의 시간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또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그 영화는 이미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다시금 그 영화로움이 재연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보통 사람들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은 그를 따랐던 이들에게 가장 절망되고 비관된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나무 형틀에 매달려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힘없이 죽어가는 무능력자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를 죽인자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승리로도 보였던 것입니다.
“나는 질투하는 신이다.”라고 외쳤던 신이 질투에 겨워 예수님을 죽이고 나서 “나는 승리 했고, 그는 실패했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을 제외한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죽는 순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요한복음의 이 기도와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대로 해석해보면 분명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영광되게 하십니까!”인데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발음은 그대로 인용되면서 뜻은 왜 다른 발음을 인용한 것인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직접음성이 우리의 판단기준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사람들은 온통 번역본에 의존하여 예수님을 치졸하고 나약하게 드러내는지 모를 일입니다.
“나는 내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천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업적들을 생각만 하여도 결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을 분도 아니고 하나님을 원망할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상이한 말씀의 차이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의도적인 방해공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십자가의 죽음이 자기를 영화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그 자체가 말할 수 없이 무한한 영광이요, 그의 죽음은 그 자신의 영화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영화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영화롭게 만들었고, 아들은 또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함으로써 그의 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그의 사명의 완수라 함은 말 할 것도 없이 예수님의 사망을 의미합니다.
그는 하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서 출생하여, 이 세상에서 생활하고, 이 세상에서 사망했습니다.
사람으로서의 그의 삶을 온전히 수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 다시 감으로 해서 그는 ‘영생’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이 마지막 기도에는 어떤 비관도, 무리도, 부조리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시간을 철두철미하게 진리 완수를 종결하는 완전한 시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예수님의 참 모습일 뿐, 십자가에서의 그의 죽음을 두고 그 어떤 기우적인 요소도, 왈가왈부도 허락할 수 없습니다.
백천(白泉) 김준식
MS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