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교회
 
작성일 : 18-07-06 20:52
설교제목 : 요한복음강해(18:19~27)
 설교일자 : 1980.08.10
 KEY WORD : @@ 예수 대제사장 안나스 가야바 베드로 닭
 성경구절 : 요18:19~27
 관련구절 : 마26:59~66, 막14:55~64, 눅22:66~71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016  

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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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18장 이후부터 마지막 장 까지는 예수님이 로마 군대와 유대인에게 결박 당하고 제사장 앞으로 끌려가서 모욕을 당하며 빌라도 총독에 의해 심판대에 서고 십자가에 목 박히신 이후 부활하신 사건까지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네 복음서의 기록을  비교해 볼 때 다른 점이 있는데 그 다른 점 중에서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다. 

다른 사건과 말씀에 대한 기록은 틀릴 수가 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목 박힌 사건이나 부활에 관한 기록은 다를 경우 이것은 우리 신앙상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덮어놓고 있는 그대로 믿는다는 것은 올바른 신도의 태도가 아니다. 

이렇게 4복음서의 기록이 틀린 것은 필사자들에 의해 재구성되어서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일부 신학자도 있다.



요한복음의 기록이 다른 복음서와 크게 다른 것은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이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 전 제사장의 관저로 끌고 간 기록이다.

그 당시 안나스는 대제사장이 아니다.

그는 가야바 이전의 대제사장으로 AD6~7년에 임명되었던 원로 제사장 이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직접 가야바 제사장 관저로 끌려간다.

다른 차이가 나는 기록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마태27:45~46절 및 마가15:25~34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시간이 제3시(오전9시)이고 제9시에 숨을 거두신 것으로 기록 되었으나 요한19:14~16절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준 시간이 제육시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간을 유대인 시간 계산법에 의하면 낮 열두시가 돼서 공관복음의 예수님의 운명 시간과 틀리게 된다. 요한복음 원어의 제6시는 “헥토스(ἐκτός)로 유대시간 제6시가 된다. 요한복음은 AD 1세기 말 에베소에서 기록됐고 에베소는 그 당시 로마시간 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제육시는 오전 6시가 된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럴 경우에 원어에 제시된 시간과 상반된다.)



마태27:45~46(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15:25~34(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요한19:14~16(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1)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 관저에 끌고 갔다는데 공관 복음서에는 그런 기록이 없는 걸까? 

우리는 맹목적으로 믿기 보다는 의심을 갖고 검토 해봐야 된다.

예수님을 결박해서 안나스 전 제사장에게 끌고 간 사건을 목격한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 밖에는 없었다.

마태는 간접적으로 전하여 들은 사건을 기록했다.

누가는 예수님의 직접 제자가 아니었다.

마가도 예수님의 직접 제자가 아니고 베드로의 조력자였으며 베드로에게 들은 것을 바탕으로 마가복음을 기록한 것이다.

불행히도 베드로 복음서라는 책이 있지마는 신약성경 내에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제일 정확한 기록은 요한복음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 안나스는 전 원로 대제사장이었고 그의 관저는 가야바 당시 제사장 관저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안나스는 그의 관저 밖으로는 좀처럼 나오질 않았다.

여기서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는 사건을 기록할 때 기적은 기적끼리 예수님의 말씀은 말씀끼리 모아서 기록하는 형태로 마태복음을 기록 했다.

그래서 마태는 안나스 관저에 예수님이 끌려 간 것도 제사장의 뜰로 묶어버린 것이다.  



네 복음서의 기록이 가장 크게 틀린 것은 부활 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난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마태 26:32절에 의하면, 예수님 생전에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라고 기록이 되어있고 마태복음 28:10절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 한 다음 갈릴리에 가서 제자들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마가복음 16:9절 이하 구절은 신약성경 중 가장 인정 받는 시내 사본과 기타 사본에는 그 기록이 없다.

따라서 9절 이하는 추후에 추가된 기록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록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기록의 차이가 있어서는 곤란 하다.

이와 같은 기록의 차이를 원본을 근거로 철저히 규명해 보면 그 차이점의 원인을 찾아 그 일치점을 발견 할 수 있는 것이다.

 


마태26:32(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마태18:10~16(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부인하는 신학자들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잊고 있는 것을 증명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오리라. 보혜사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며 내가 너희와 같이 있겠다.” 고 하신 말씀을 상기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는 “예수님이 아직도 살아계시다, 너희는 나를 볼 것이다 하고 하신 그 약속을 상기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면 예수님과의 접촉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심령 속에 예수님을 보지 못할 때 그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견해가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부정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신학자들이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현 기독교의 지도자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 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 설교를 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을 정확히  해석해 줄 책임이 있는 것이다



25~27절, 타 복음서에서는 “너도 이 사람의 도당이 아니냐” 라며 자세히 언급 되어 있다.

베드로는 13:36~38절에 “주여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 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라고 말했고 바로 얼마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 목숨마저 버리겠나이다.”라고 다락방에서 고백 했는데 첫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부인 하신 것이다.

이런 상황을 여러분 상상해보기 바란다.. 

대제사장의 종 하나가 예수님을 뺨을 때리는 것과 모욕을 당하고 있는 예수님 그 모습,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 하는 모습 등은 안타깝지만 인간이란 속성 상 이런 일이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도 그의 생각에는 이때까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모욕적인 장면을 대 제사장 앞에서 당하는 것을 보고 내 생각이 어리석었다고 생각 할 수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베드로가 그때까지 예수님을 정확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그 이후에 용기 있고 담대한 사람으로 변신하여 그 당시 최고 권력자인 종교 지도자들 앞에 주눅이 들지 않고 담대히 말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고 접촉했던 것이다.

사도행전 1:1~9절에 보면 예수님은 부활 후에 40일간 이 세상에 있으셨고 베드로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몇 번 보았고 성령의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된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그 본질이 고쳐지려면 예수님을 보았거나 성령의 접촉이 없이는 개조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요한13:36~38(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사도행전1:1~9(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 제자들을 왜 하나님의 진리를 완전히 깨달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지 않고 떠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온 그 근본 목적은 예수님의 행적으로 알 수 있는 가르침이나, 병자를 고쳐주거나, 표적을 행하러 오신 것이 근본 목적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 사명을 완수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하루 속히 이 세상을 떠나 가셔야 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예수님을 대신해서 그 제자들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보혜사’란 선물을 약속 하신 것이다.

“내가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너희들이 완수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의 진리를 완전히 깨달을 수 없다.

그렇지만 천분의 일 혹은 만분의 일이라도 그 진리 가운데 아주 적은 핵심 부분을 확실히 깨달아서 우리의 삶 속에서 생활화하고 생명화해야 되는 것이다.

재차 강조 하지만, 우리의 확고한 신앙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라는 예수님 말씀에 바탕을 두었을 때 온전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이 확고한 신앙이야말로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그 어떤 환란과 역경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굳건히 그 뿌리가 내려지게 할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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