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0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0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0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0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0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0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0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0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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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말씀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자격, 다르게 표현하자면 천국의 일원(一員)이 될 수 있는 사람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은 복 있다 하는 말들이 여덟 번 반복된다고 해서 ‘팔복’이라고도 하고, 또
학자들 가운데는 처음 복과 나중의 복을 합쳐서 ‘칠복’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요약을 하면, 이것은 팔복이나 칠복이 아니라 하나의 복을 말씀하고 있다.
먼저 마태복음의 기록과 누가복음의 기록에는 차이가 있다.
그것을 먼저 살펴보면
1. 심령이 가난한 자(마)/ 가난한 자(눅),
2. 의를 위해 주린 자(마)/주린 자(눅)
3.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요(마)/우는
자는 웃을 것이요(눅)
이렇게 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는 나머지 말들은 빠져 있다.
참고해서 살펴보시길 바란다.
누가6:20~22(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기독교 성경이 육십여 권, 혹은 배경에 관한
것까지 합하면 칠팔십 권이 되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말씀 중 하나가 오늘 이 말씀이다.
그러면 원어에 적혀 있는 대로 직역해보겠다.
첫째: 영이 가난한 자들이 행복하니 그 하늘들의 나라가 저들의 것이고
둘째: 애통하는 자들이 행복하니 저들이 위로를 받아질 것이고(‘부름을 받아질 것이고’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셋째: 겸손한(온유한) 자들이 행복하니 구역(區域)을
지금 받을 것이고 (서양 사람들의 번역이라든가 우리나라에서는 땅이라고 했지마는 원어( “γῆ “ )의 뜻은 “땅”(land)”,세상(earth)”,”구역”(region)의 뜻이 있으나 본문에서는 ‘육지의 한 부분’으로 구역(區域)으로 해석함이 적절하다.
넷째: 의(義)에
기갈(飢渴 ;배고프고 목마름 )하는 자들이 행복하니 저들이 충족하여질 것이고(의(義)에 기갈(飢渴)한다는 것은 의(義)에
주리고 목이 말라서 아주 숨이 콱콱 막힌다 하는 그런 의미이다.)
다섯째: 자비스러운 자들이 행복하니 저들이 자비를 받게 될 것이고
여섯째: 원어로 “칼디아(καρδία)”는 “심장”,”중심”,마음”의 뜻이 있으나 본문에서는 “중심”으로 해석함이 적절하다. 따라서 중심이 순결한 자들이 행복하니, 저들이 하나님(혹은 원어대로 말하면 그 신)을 볼 것이고
일곱째: 평화를 조성하는 자들이 행복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을 것이고
여덟째: 정의(正義,Righteousness) 때문에 핍박 받는 자들이 행복하니, 그
하늘들의 그 나라가 저들의 것이다
나는 영어나 독일어 혹은 불어 이런 정도의 각종 번역을 나름대로 구해서 읽어보지만, 새로 번역이 나올 때 마다 대부분 원어의 뜻과 다르게 번역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이것을 세계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학자들이란 사람들이 오역(誤譯)을 함으로서 오늘날
기독교라 하는 것이 점점 제 구실을 못하고 또한 사회적으로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 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진짜 생명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곤란한 일일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이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 이렇게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듯 진리는 하나이다.
예수님을 알자는 것이 목적인 이상, 성경은 예수님을 알기 위한 수단이며 성경 가운데서 예수님을
발견해 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하면 성경은 근본적인 가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성경을 읽는 이유는 성경 안에 하나님의 말씀 있기 때문인데, 즉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연구하고 공부하고 이 말씀을 상고 하는 것이다.
또 이 말씀뿐만 아니라 지금도 예수님은 살아 계시므로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면모를 성경 안에서 항시 접촉할 수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이라 하는 것에는 산 책과 죽은 책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이 오역이 되어서 말씀이 잘못 전달될 때 죽은 책으로 간주될 수 있고 성경의 기록이 올바르게 전달되어서 예수님이 아직도 살아계신 것을 입증 할 수 있을 때 산 책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시니까 살아있는 그분하고 우리는 언제나 교통(交通)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기독교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교통이 안 되는 까닭에 죽은 책만 가지고 근본 없는 이론만 전시하고 있다.
오늘 이 마태복음에 쓰여 있는 이 여덟 가지는 그 자체에 해석이 있는 것이다.
여기 여덟 가지로 나열한 것에 대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한 마디 말씀을 하시고는 그 말씀에 대한 대한 해석을 해주셨다.
여기 영이 가난하다거나 심령이 가난하다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그 아래에 기록 된 것과 같이 의를 위하여 기갈(飢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정의 (正義;Righteousness)를 위해서
항시 배고파서 못 견디고 마실 것을 찾아 애쓰는 것과 같은 갈증을 느끼는 사람, 즉 다시 말하면 정의를
위해서 주리고 갈증을 느끼는 사람을 가리켜서 여기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그 자체에 해결이 있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이라고 하는 것은 정의를 위해서 기갈(飢渴)을 느끼고, 고갈(苦渴)을 느끼고, 견디지 못해서 몸부림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천국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그 천국이
그들의 소유되는 것이다.
여러분, 아무나 천국을 가는 것은 아니다.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에게 있어서 사랑보다 앞서는 것은 ‘법’일
수 밖에 없다.(“이 법은 유대인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에 근거한 법을 말한다.
아무리 사람을 사랑하고 귀엽게 봐도 하나님께선 법을 어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법은 진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정의를 위해서 고갈을 느끼고, 굶어서 주린 사람과 같이,
허덕거리는 사람이라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못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 3절에서 '복이있다.' 혹은 ‘행복하다’는 형용사로서 원어로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이며, '복된', '축복된', '행복한',의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 ‘하늘들의’는 복수형(명사 소유격)으로
원어는 “우라논(οὐρανῶν)” 이다.
이렇게 기록된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늘의 의미를 마태가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던 하늘에 대한 개념을 유대 사상으로 이해하고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1절의 하늘 역시 복수형이 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셋째 하늘- 땅 위의 하늘/ 그
위의 하늘/ 자신들의 신이 있다고 믿는 그 하늘-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여진다..
다음 4절에 보면, 「애통하는 자들이 행복하니 저들이 위로를 받아질 것이고」 이렇게 되어있다.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당연한 하나의 규례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 말이다.
5절에 보면, 「겸손한(온유한) 자들이 행복하니 구역을 지금 받을 것이고」
이 말씀은 대단히 이질적인 구절이다.
이 구절은 시편37장11절(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에 있는
기록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반기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다.
구역, 혹은 넓게 봐서 땅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여호와의 소유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셨다.
다시 말하면 이 땅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한 부자 청년이 예수께 나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행복한 생활을 오래 유지 하는 것을
의미)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네 마음이 온유하면(계명을 잘 지키면) 그 유산을 오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자 부자 청년은 그런 것은 잘 지켰다 라고 말했고, 이 말에 대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렇다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부자청년에게 하신 말씀과 이 구절은 양립될 수 없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천국을 말씀 하시면서 땅에 대해 말씀을 하실 일는 없는 것이다.
이 구절은 후대의 필사자에 의해 삽입이 되었다고 추정되며, 따라서 이 구절은 배제하고 읽는
것이 적절하다.
시편37:11(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다음 8절에 보면, 「중심이 순결한 자들이 행복하니 저들이 그 신(하나님)을 볼 것이고」
이 구절에서 '순결한', 청결한' 이것을 원어대로 보면 “카다로스(καθαρός)”이고 속 내용이, 속이나 안이 '순결한', 청결한' 이란 의미 이다.
이 사람이 외모는 어쨌든지 간에 속살은 먼지 하나 없는, 티끌 하나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여기서 ‘볼 것이다’에 해당하는 원형은 “호라오(ὁράω)”이며, 요한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의
“데오레오’(θεωρέω)”단어의 ‘보다’와 같은 의미 이다) 또 14:7( 이제부터 너희가
그를(하나님을)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에 나와 있는 ‘본다’와
같은 말이다.
영어로는 prospect, distinguish, perceive 정도의 뜻을 가지는데
한국어로는 ‘알아 본다’ 가 가장 적합한 말이다.
많은 신들 가운데 예수의 아버지 신과 여호와 신을 구별하여 알아 본다 그런 뜻이다.
하나님을 본다 하는 것은 천국의 소유자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9절로 가서, 「평화를 조성하는 자들이 행복하니 신의 아들의 칭호를 받을 것이고」
이스라엘 말에서 신자(神子) 즉 여호와의 아들이란
말은 인자(人子)에 대조되는 말로 보통 사람은 아니다 혹은
훌륭한 사람이다 라는 뜻으로 쓰이던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라는 그런 의미이다.
그러나 평화를 가져오려 많은 노력을 하는 이가 이 세상에서 있을 수는 있지만, 참 평화를
조성하는 사람은 오직 정의와 진리에 입각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나는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참된 평화는 악신과 죄와 싸워 이겨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10절에 보면, 「정의 때문에 핍박 받는 자들이 행복하니 그 하늘들의 그 나라가 저들의 것이다」 여기에 기록 된
이 ‘의’는 이 세상의 상대적 의가 아닌 철저히 진리에서
나오는 법에 따른 의를
말한다.
여기 칠복 중 절대적으로 천국에 관련된 조항은 단 둘 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그것이다.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복이 있다는 11절의 말씀은 의를 위해 핍박 받는다는 말씀
속에 들어 있는 것에 해당되므로 따로 볼 것이 아니다.
나머지 말들은 대단히 듣기 좋고 흐뭇한 말이다.
애통하는 자, 의를 위해 목마른 자, 자비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평화를 조성하는 자 등은 복이 있다, 즉 바람직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댓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천국의 시발점에 설 수는 있겠지만 천국의 소유자로 단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여덟 혹은 일곱 종류의 기록이 있지만 결국은 천국의 일원이 되는 조건은 하나
‘진리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자’ 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인간의 소질적 측면(자비로운 사람, 중심이 순결한 자)과 활동적 측면(심령이
가난하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정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을 말씀해 주셨다.
소질을 가진 사람이 활동적 측면을 더할 때 그리고 그 다음에 평화를 조성하는 사회적 영향력을 끼칠 때 비로소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런 사람이 최종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끼치려 할 때 필연적으로 핍박을 받을 것이고 이것이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소질만 갖고는 천국을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기 여덟 가지의 말씀을 읽어보면 믿음이란 말은 단 한 마디도 없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로서 확고히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 교회에서 믿음이라 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확실히 말하지만 무조건 믿는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오늘 여기 이 기록은 천국에 갈 수 있는 조건 즉 자격을 말해준 것이다.
이것이 된 후에 신앙은 자동적으로 생기게 마련이다.
신앙이란 것이 억지로 생기는 게 아니다.
억지로 생긴다 하면 그건 미신이다.
미신과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피스토스(πιστός)” 즉 ‘참된 신앙’이라 하는 것은 180도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라 하는 것은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백천(白泉)
김준식